셋째로, 과일 재배법을 한국인에게 전수해 조선의 농업기술 진흥에 기여했다. 펜윅이 과일 재배와 농사법을 전수한 첫 번째 제자가 윤병수(尹秉秀, 1867-1944)이다. 사실 윤병수는 펜윅의 농장 견습생이 되기 이전 1885년 10월 25일에 원산항(元山港) 장무관(掌務官)으로 임명받아 약 2년 6개월간 벼슬아치로 일했다. 공무원이었던 윤병수는 원래 묘목 재배에 관심이 많았는데 펜윅을 만난 이후부터 새로운 인생길을 걸으며 과수 재배 전문가로 성장하게 됐다. 그렇다면 윤병수가 펜윅의 과수원 제자가 맞는지, 언제부터 견습생이 됐는지, 학농원(學農圓)을 세워 언제쯤 자립했는지, 그리고 개화기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하다. 이에 관해 여러 자료가 있는데 연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겠다.
1) 1909년 3월 14일자 황성신문 기사
첫째가 1909년 3월 14일자 황성신문의 기사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원산거(元山居) 윤병수씨(尹秉秀氏)는 원래(元來) 종식업(種植業)에 유지(有志)ᄒᆞ야 거(去) 광무(光武) 팔년(八年)붓터 당지(當地)에 주거(住居)ᄒᆞᄂᆞᆫ 영국(英國) 목사(牧師) 편위익씨(片爲益氏)에게 종예술(種藝術)을 강습(講習)ᄒᆞ야…회자(膾炙)ᄒᆞ더라.”
황성신문에서는 윤병수가 1904년(광무 8년)부터 펜윅에게 파종 기술을 배운 제자임을 밝히고 있다.
2) 1909년 5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둘째가 1909년 5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인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원산항(元山港) 거류(거류)ᄒᆞ는 농학사(農學士) 영인(英人) 편위익(片爲益)시의게 육칠년(六七年)동안 실지견습(實地見習)으로 농리(農理)ᄅᆞᆯ 연구(硏究)ᄒᆞ던 윤병수(尹秉秀) 이정화(李正華) 양(兩)시ᄂᆞᆫ 사오년(四五年)전(前)부터 신식(新式) 과포(菓圃)에 각양(各樣)채수(菜樹)ᄅᆞᆯ 오륙백주식(五六百株式) 영국(英國)에 주문하며…광구(廣求)ᄒᆞᄂᆞᆫ 중(中)이라더라.”
이 기사에서는 윤병수가 6~7년간 견습생으로 일한 것으로 기록해 1902~3년부터 펜윅의 견습생였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4~5년 전부터 영국에서 5~600주의 묘목을 구입한 뒤 과수원을 시작했다고 기록해서 윤병수가 1904~5년부터 펜윅에게서 독립한 후 자립적인 과수원을 시작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3) 1929년 8월 20일자 조선일보 기사
셋째가 1929년 8월 20일자 조선일보에 한용운이 기고한 “명사십리행”(明沙十里行) 기사에는 윤병수의 과수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팔일(八日)은 조반(朝飯)을 먹고 나서 그 지방(地方)에 과수업(果樹業)의 성공자(成功者)로 유명한 두남리(斗南里)의 윤병수씨(尹秉秀氏)를 그 과수원사무실(果樹園事務室)로 방(訪) 하얏다.…과수(果樹)를 처음으로 재배(栽培)하기는 지금으로부터 삼십사년전(三十四年前)인대 그 때에는 천여평(天餘坪)의 지단(地段)에 평과(苹果) 일백이십여주(一白二十餘株)를 심엇습니다. 차차 느러서 지금은 전면적(全面積) 팔정보(八町步)에 과수(果樹) 일천칠백여주(一天七百餘株)인데 평과(苹果) 구백여주(九百餘株)와 이(梨) 팔백(八百餘株)입니다.
조선일보에서는 윤병수가 지금부터 34년 전에 과수원 재배를 시작했다고 했으니 1895년에 과일 재배를 시작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윤병수는 1895년에 1천 평의 땅에 사과 120주를 심었고, 1929년에는 2만 4000평(8정보)의 땅에 과일 1700주를 심었는데 사과가 900주였고, 배가 800주였다. 당시 윤병수는 펜윅의 농장 제자로서 원산에서 과일 재배의 최고 일인자가 되어 명성을 떨쳤다. 이 사실을 1924년 12월 1일자 개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개벽에서는 윤병수를 원산의 “평과대왕”(苹果大王)으로 소개하며 사과 재배의 1인자임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4) 1935년 9월 27일자 동아일보 기사
넷째로 1935년 9월 2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과수원(果樹園)게에 공로(功勞)잇는 원로(元老)가된 윤병수(尹秉秀) 옹(翁)인데 그는 학농원(學農圓)이라는 과수원(果樹園) 이름을 부치고 영업(營業)만이 아니고 능금 재배(栽培)의 개량법(改良法) 등(等)을 연구(硏究)하야 실로 과수원(果樹園)게에 막대(莫大)한 공헌(貢獻)이 잇다고 한다.”
동아일보에서는 윤병수가 학농원을 개원하여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1935년 당시에는 원로가 되어 사과 재배의 새로운 방법을 연구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임금주 개발이었다. 사실 윤병수는 20년 전부터 임금주 연구를 진행했는데 1930년에 임금주 개발에 성공한 뒤, 5년 후인 1935년에 한국인 최초로 임금주 제조에 성공했음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