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는 넬슨제독의 기념탑보다 셰익스피어의 고가(古家)를 더 사랑한다. 독일에는 괴테와 뮐러의 동상 그리고 베토벤의 데스마스크가 신격화되었다. 파리의 중심은 루브르 박물관이며, 곳곳에 문화의 유적들이 있다.
우리의 정서와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인 애국자나 영웅들이다. 한 줄의 시를 쓰는 것보다 한 뼘의 땅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는 투쟁을 한다. 한 가락의 노래를 창작하는 것보다 하루를 우환없이 지내야만 하는 것이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이다.
시가(詩歌)에서 나타난 “임”은 애인이 아니라, “임금”이며 “나라”다. 연가(戀歌)는 천한 기생이나 읊는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번 고쳐 죽어....”의 그 애국 충정이 더 절박했고 귀중한 것으로 믿어왔다. 삶의 대한 충정보다는 죽음의 대한 찬가를 부르며 살아왔다.
같은 충신이라 할지라도 “생육신”보다는 “사육신” 쪽이 더 훌륭한 것으로 여기며 그렇게 믿어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산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며, 죽은 자 만이 영웅이라는 편견도 있다.
이준 열사가 만약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병사하지 않고 살아 돌아 왔더라면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의 애국은 혈서의 애국이다.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야 열녀가 되었던 것처럼 언제나 “피”를 흘리는 것이 애국이며 손가락을 깨문 애국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금을 낸다든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지킨다든지 조국의 초목을 아낀다든지 하는 것은 별로 애국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플랜카드를 들고 거리에 나오는 것은 애국이지만, 실험실 속에서 플라스크를 흔든다거나, 강의실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애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과장된 그 애국은 언제나 “결사적”이란 말을 앞세운다. 조용한 애국이 아니라, 시끄러운 애국이며 창조적인 애국이 아니라, 방어 하는 애국이다. 입에 거품을 품고 눈에 핏발을 세운 애국, 한국에서는 참으로 살아서 애국하기가 어려운 나라다. 유관순의 피 묻은 치마 자락만 찬양하다가, 거문고 타던 황진이의 사랑의 손길은 잊었던 것이다.
그것도 수천 수만의 유관순의 얼굴이 아니라, 외로운 언덕에 홀로 우뚝선 청송 같은 모습이다. 성삼문처럼 애국자는 많았어도 그것은 밀림 같이 한데 어우러진 수풀이 아니라 모두가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같은 것, 백설이 천지를 덮을 때 독야청청하는 고립된 애국자들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목적이 같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협동하는 정신이 필요한 때다. 마음을 같이 하고 뜻을 같이 하여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