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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침례교 2> 윌리엄 캐리와 침례교회

 

1. 영국에서의 삶과 사역

1) 어린 시절

현대 선교의 아버지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전파의 열정을 탁월하고 선구적인 방법들로 실현시킨 위대한 침례교 선교사였다.

그는 1761817, 영국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국교회 신자인 에드먼드 캐리(Edmund Carey)와 엘리자베스(Elizabeth) 사이의 5남매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드먼드는 자선 학교의 교장과 교구교회의 서기로 일했으나 수입은 변변치 못했다.

캐리의 청소년 시절 세계는 식민지 전쟁과 미국독립전쟁으로 혼란하였고, 과학, 지리학, 운송수단의 발달로 외국과의 교류와 무역이 급격히 늘어나던 때였다. 영국은 도덕적 타락이 심각했고, 교회의 영성도 낮은 상태였다. 당시에 국교회는 밤에 자고, 비국교회는 낮에 잔다.” 라는 말이 유행하였는데, 그것은 영국 기독교의 전반적인 영적 무기력을 꼬집는 말이었다.

시골에 살고 있는 어린 캐리에게 이와 같은 외부세계의 급속한 변화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는 가난으로 인해 정규학교에서 공부할 수 없었지만, 성경과 경건서적뿐만 아니라 과학, 역사, 여행기 등의 서적들을 많이 읽었다. 캐리는 특히 제임스 쿡(James Cook)항해 일지를 읽고 크게 감명 받았다.

게다가 캐나다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에 참전하고 돌아 온 피터 삼촌의 모험담은 이국에 대한 그의 동경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캐리는 세계지도를 벽에 붙이기도 하고, 가죽으로 지구본을 만들어 놓고 남태평양 군도나 다른 지역으로의 여행을 상상하곤 했다. 캐리는 또한 자연을 좋아해서, 그의 작은 방에는 늘 새와 곤충의 표본들과 온갖 꽃들로 가득 차 있었다.

 

2) 개종과 결혼

캐리는 14세 때 인근 마을의 구두수선 집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비국교회 신자였던 동료 제화공 존 와르(John Warr)를 만났는데, 이 만남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캐리는 와르와 함께 비국교도들의 성경공부 모임과 기도회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결국 177918세 때 공개적으로 회심을 고백하게 됐다. 캐리는 20세가 되던 1781610일 비국교도이자 5살 연상인 도로시 플래케트(Dorothy Plackett)와 결혼했다.

캐리는 성경을 연구하다가 신자의 침례가 성서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1783105일 주일 아침 존 릴랜드 2세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3) 목회

침례교 신자가 된 이후, 캐리는 앤드류 풀러, 존 서트클리프, 존 릴랜드 2세 등 당대 영국 침례교회의 영성과 지성을 이끄는 목회자들과 교제하게 됐다. 그리고 1785년부터 17895월까지 4년간 물턴(Moulton)교회에서 사역했다.

캐리는 턱없이 부족한 사례비를 받으며 열심히 목회하다가, 178781일 정식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물턴에서 목회하는 동안 세 아들, 펠릭스, 윌리엄, 피터를 얻었다. 한편 라이세스터 시의 하비레인 교회는 캐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였고, 그는 178957일에 새로운 임지를 향해 떠났다.

도시 교회는 사례비를 더 많이 주었지만, 가족의 생계에는 여전히 부족하였기 때문에, 캐리는 목회와 신발수리 가게의 운영을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

 

4) 침례교선교협회의 창립

17925월의 마지막 3일 동안 개최된 놀쌤턴셔 지방회에서, 캐리는 31일 수요일 오전 10시 폐회예배의 설교를 맡았다. 그는 이사야 542~3절의 말씀으로 이방인을 향한 복음전파의 사명을 강조했다. 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자”(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고 외쳤다.

그의 설교는 모두를 감동시켰지만, 해외선교는 너무나 큰 일로 보였다. 지방회장 풀러가 구체적인 결정 없이 모임을 끝내려 하자, 캐리는 풀러의 옷소매를 잡고 애원하였다: “선배님. 이번에도 아무런 조처 없이 끝낼 것입니까?” 캐리의 간청은 효과를 발휘했다.

풀러는 다음 모임에서 해외선교를 위한 협회를 구성하는 문제를 토의하자는 동의안을 냈고, 그것은 가결됐다. 1792102일 풀러의 캐터링 교회 과부 성도 비비 왈리스(Beeby Wallis)의 집에서 12명의 목회자들이 모여 침례교선교협회(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설립하고 즉석에서 13파운드 2실링 6펜스의 헌금을 모았다.

 

2. 인도에서의 삶과 사역

1) 인도에서의 정착과 고난

침례교선교협회는 윌리엄 캐리와 존 토마스 박사를 인도 선교사로 임명했고, 그들은 1793613일 출항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인도와의 무역뿐만 아니라, 체류허가와 같은 행정업무를 동인도회사에 맡겼다.

 회사는 선교사들에게 입국 허가장을 발부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선교가 회사의 이익에 반대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캐리는 처음에는 불법적으로 체류하였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난 1795년부터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었다.

인도에서의 정착은 질병과 경제적 궁핍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캐리는 공장 관리자로 취직하면서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5살 난 막내아들 피터가 이질로 사망하게 되고, 이 일로 도로시는 심한 우울증과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다.

도로시는 그런 상황에서 결코 헤어 나오지 못하고 이국에서 비참하게 생애를 마쳤다. 캐리의 화려한 업적의 뒤안길에는 아내 도로시의 희생이 있었다.

 

2) 세람포레에서의 사역 및 공헌

(1) 세람포레로의 이주와 첫 개종자

1799년에 인도에 온 영국 침례교 선교사 조슈아 마쉬맨(Joshua Marshman)과 윌리엄 워드(William Ward)와 함께, 캐리는 선교활동이 보장된 덴마크령 세람포레로 이주했다. 이들은 공동체 생활을 했으며, 공동체는 철저히 민주적으로 운영됐다.

캐리는 세람포레에서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인도 선교 7년 만에 최초의 개종자를 얻게 됐다. 힌두교 신자이자 목수였던 크리쉬나 팔(Krishna Pal)18001228일 덴마크 총독과 많은 유럽인들, 그리고 힌두교와 모슬렘 교도들이 보는 가운데 신앙을 고백하고 갠지스 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팔의 개종은 곧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개종으로 이어졌다.

 

(2) 학교사업, 성경번역, 교회개척

조슈아 마쉬맨은 어린이 교육을 위하여 수 십 개의 학교를 세웠다. 그의 학교들은 성공적이었고, 그 결과 개종자들도 늘어났다. 인도 사람들은 선교사들에게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요구했고, 캐리와 동료들은 세람포레 대학을 설립했다.

캐리는 성경을 원주민 언어로 번역하고 현지인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보다 더 영속적인 결실을 맺는 선교 전략을 실행했다. 성경번역은 참으로 고역이었으나, 성경을 번역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았던 선교사들은 그 힘든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은 34개의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된 성경 212,000권을 출판했다. 또한 원주민이 중심이 된 자립, 자치, 자전하는 교회를 세워나갔다. 곧 캐리는 번역자로, 워드는 인쇄소 경영자로, 마쉬맨은 언론인으로 유명해졌다.

 

(3) 인도의 문명화와 사회 개혁

캐리는 복음주의 선교관에 입각하여 직접전도, 성경번역, 교회개척, 학교설립 등과 같은 선교 사업을 수행했지만, 그러한 사역은 인도의 문명화와 사회 개혁을 진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또한 빈곤 퇴치를 위한 농업원예협회를 설립하고, 자신의 교회에서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우했으며, 유아살해나 살아있는 부인을 죽은 남편과 함께 화장시키는 사티라는 악습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는 등, 인도 사회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3. 결어

영국 시골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식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뜨거운 열정과 불굴의 의지로 인도 선교의 대업을 이룬 윌리엄 캐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 별이 되었다.

그의 선교는 현대 선교의 모델이 됐으며 그의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캐리는 이 모든 눈부신 성과나 업적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더 소중히 여겼다.

1834년 캐리의 죽음이 코앞에 이르렀을 때, 그의 오랜 친구이자 선교사인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가 그를 방문했다. 더프는 얼마 동안 앉아 있다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그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프,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캐리 박사에 대해 많이 말해 왔소. 내가 떠나고 나면 캐리 박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시마시고, 캐리 박사의 주님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는 주님을 가장 깊이 사랑해서 그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소박하고 평범한 주의 종이었다. 캐리의 묘비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와트(Watt)의 찬송가 구절이 새겨졌다: “더럽고 불쌍하고 무력한 벌레인 제가 주의 친절한 팔에 안깁니다.” (A wretched, poor, and helpless worm On Thy kind arms I fall).

 

김용국 교수

침신대 신학과(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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