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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침례교-3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

 

1. 생애와 사역

 

스펄전의 회심과 침례

찰스 해돈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19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설교자이며 사회사업가였다. 그는 초대형 교회를 이룩하여 기독교 신앙을 확산시켰지만, 그에 못지않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사업에도 적극적이었다.

1834619, 영국의 켈베돈(Kelvedon)이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회중교회 목사 존 스펄전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성경과 청교도 서적들을 즐겨 읽었으며, 기도생활의 중요성을 알았다.

스펄전은 동네의 사설학교와 성공회 학교에서 공부하며 평범하고 행복한 10대의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의 확신과 관련해 오랜 시간을 고뇌하게 됐다. 그러던 중 악천후로 인해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에 가지 못하고 동네에 있던 작은 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동안, 갑작스럽게 회심을 경험했다.

그때는 185016일이었다. 스펄전은 회심한 지 5개월 후인, 185053일 침례교 목사 캔틀로(Cantlow)에 의해 침수침례를 받고 침례교 신자가 됐다. 세 가지 이유로 스펄전은 회중교회에서 침례교로 전향했다.

첫째, 그가 성공회 학교에서 배웠던 성공회 요리문답집은 침례를 받으려면 먼저 죄를 회개하고, 침례와 관련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스펄전은 유아세례가 이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그가 다녔던 뉴마켓 학교의 교장인 존 스윈델은 침례교인이어서,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스펄전 자신이 신약성경을 연구하면서 신자의 침례가 성서적이라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설교자로서의 시작

스펄전은 침례교 신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근의 워터비치(Waterbeach) 침례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됐다. 17세의 젊은 목사 스펄전은 12명 교인을 불과 몇 달 안에 400명으로 늘어나게 하였다. 그의 명성은 퍼져나갔고, 1853년에 런던의 뉴팍스트릿 교회(New Park Street Chapel)로부터 청빙을 받게 됐다. 그 교회는 영국 침례교회의 기라성 같은 목회자들이 시무하였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였다.

스펄전은 18531218일 첫 설교를 했는데, 1,200석 규모의 예배당에는 약 120명의 성도만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스펄전은 뉴팍스트릿 교회에서 목회하는 도중 수잔나 톰슨이라는 여인과 185618일 결혼했고, 쌍둥이 아들 찰스 스펄전 2세와 토머스 스펄전을 얻었다.

수잔나는 일찍이 신장병이 발병하여 평생 아픈 몸으로 살아야 했지만, 스펄전은 병든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고 돌보아주었다. 두 아들은 후에 아버지처럼 모두 설교자가 됐다.

 

대 부흥

뉴팍스트릿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200석의 좌석은 스펄전이 설교를 시작한지 12주 만에 다 차버렸다. 따라서 약 4천 내지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엑스터 홀(Exter Hall)을 세내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홀도 얼마 가지 않아 밀려들어오는 성도들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교회는 결국 1856년 새로운 교회당을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4년 반의 노력 끝에 18613월 완공하여 교회명을 메트로폴리탄 테버네클(Metropolitan Tabernacle)로 했다. 스펄전은 이후 38년 동안 이 교회에서 수많은 성도들을 향해 불을 뿜는 설교를 했다.

 

고난과 함께한 57년의 생애

스펄전은 24세였던 1858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간혹 심하게 아팠다. 그는 넓적다리부터 무릎까지가 아주 짧은 선천적으로 기형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통풍이라는 지병이 있었다. 그는 식사조절에 신경을 써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운동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스펄전의 건강상태에 대한 단적인 예는 그가 1875117일 교회에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난다. 그는 편지에서 엄청난 고통을 참고 지난 후, 저는 회복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기처럼 서는 법을 배우고, 한쪽 의자에서 다른 쪽 의자로 아장아장 걷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스펄전은 말년에 심각한 병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189213157세의 나이로 프랑스 휴양지 멘톤(Mentone)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관은 189228일 눈보라치는 추운 날 영국에 도착했다. 나쁜 날씨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파가 스펄전을 맞이하러 나왔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3일 간 조문을 받았는데, 하루에 약 55,000명에서 60,000명의 사람들이 방문했다.

테버네클 교회당에서 행한 장례 예배에는 초교파적으로 유수한 목회자들이 순서를 맡았으며, 유명한 이라 생키(Ira Sankey)의 특별 찬양도 행해졌다. 매장지로 가는 행렬은 3킬로미터가 넘게 이어졌으며, 장지까지의 8킬로미터 거리에는 1,000명의 경찰들이 배치되어 질서유지를 통제했다. 영국에서 비국교도의 장례가 이처럼 관심을 끈 적이 없었다. 그의 장례식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2. 업적

1) 국내외 선교

스펄전은 국내외 선교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신학생들에게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건축하도록 독려했으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메트로폴리탄 교회의 일부 교인들을 신생 교회로 보내는 분리 개척도 했다.

1865년부터 1876년까지 런던에 새로 세워진 62개 침례교회 가운데 53개 교회가 스펄전의 목회자 대학(Pastors’ College) 출신들에 의해 이뤄졌다. 스펄전은 해외선교도 마땅히 해야 할 일로 봤으며, 국내외 선교를 위해 다양한 선교협회와 기금들을 설립 운영했다.

 

2) 건전한 신학 기풍 강화

19세기 영국은 다윈의 진화론과 고등비평으로 대별되는 이성주의가 확산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유니테리언주의가 빠르게 번져갔다. 이러한 변화에 둔감했던 교회들은 고통을 못 느낀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는데, 영국 침례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스펄전은 그가 운영하는 잡지 검과 흙손(Sword and Trowel)에서 속죄가 비웃음 당하고, 성서의 영감이 조롱당하며, 성령님이 하나의 영향력으로 전락했다. 죄에 대한 형벌은 허구로 변했고, 부활은 신화로 간주된다.” 라고 하며 개탄했다.

스펄전은 영국 침례교단을 복음주의 신앙으로 재무장시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부분적인 성공과 대체적인 실패로 귀결됐다.

그렇게 된 이유로는 반대자들에 대한 그의 지나치게 강하고 신랄한 비판으로 인해 광범위한 반발을 사게 된 점, 의견의 불일치를 참지 못하는 엄격하고 경직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조주의를 거부하는 시대적 환경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이 정당하였다는 것은 이후 침례교 역사에서 입증됐다.

 

3) 빈민구제 사업

스펄전 시대 영국은 운수업, 제조업, 서비스 산업의 발전으로 근대화, 도시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하지만 도시 노동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들은 일주일에 평균 70시간을 일했고, 작업환경도 불결하고 위험하였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1실링을 받고 하루에 12~14시간을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대도시 런던의 위생 상태는 극히 열악했다. 공중위생시설은 없었으며 종종 유행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빈곤의 문제에 관한 영국 정부의 대책은 극히 미미했으며, 중산층 이상의 교인들로 구성된 영국 국교회는 빈민들에 대해 무관심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스펄전은 가난한 자에게 하늘의 떡을 이야기하면서 땅의 떡을 주지 않으면 굶는 몸을 가지고 어떻게 복음을 듣겠습니까?” 라고 외치며, 양로원과 고아원을 세웠다. 그의 고아원에는 그가 사망할 1892년에 무려 1,513명의 고아들이 있었다.

 

4) 교육 사업

스펄전 시대 영국의 가난한 집 아이들은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으며, 문맹자로 성인이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1843년 하원은 공장 및 교육법안을 제출해 8~13세 어린이들에게 하루 세 시간씩 의무교육을 시킬 것을 제안했지만, 국민교육은 국교회가 담당해야 한다는 국교회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했다.

그러자 분노한 비국교도들은 400만 서명운동을 일으켜 1844공장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아동들이 반나절 일하면 반나절은 반드시 교육을 받도록 했으나, 노동에 지친 아이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사실상 실효성이 없었다.

영국 의회는 교사 건축이나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교회들이 운영하는 학교들에게 국가재정의 일부를 나눠주고자 하였다. 그 때 많은 침례교인들은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교회가 국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라며 거부했다.

그러나 스펄전은 침례교 목사였지만, 공공교육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새로 탄생된 교육법을 지지했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잘 인식한 사람이었다. 스펄전은 신학교뿐만 아니라 빈민 아동들의 교육을 위해 교회당, 고아원, 양로원 등에서 학교를 운영했다.

 

5) 정치 참여

스펄전은 가난한 자들의 복지, 국가교회 폐지, 참정권 확대, 제국주의 전쟁 반대 등을 위해 일정하게 정치에 참여했다. 실제로 당시 야당인 자유당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스펄전을 비롯한 비국교도들의 지원에 힘입어 집권당이 된 자유당의 글래드스턴 정부(1868~1874)1868년 종교세를 폐지하고, 1871년에는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에 비국교도들이 입학하는 것을 허용했다.

스펄전은 선거권 확대 문제도 관여했다. 영국의 투표권은 원래 귀족이나 지방 대표들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832년 중산층으로 확대됐고, 1867년에 이르러서는 모든 세대주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스펄전은 자유당과 더불어 선거권을 농민, 노동자, 상인 모두에게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러한 노력은 1884년에 결실을 거두게 됐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펄전은 복음을 전파하고, 건전한 신학의 중요성을 재인식시켰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개선과 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침례교 목사, 복음주의 설교자, 박애주의 사회사업가였던 스펄전은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국을 남긴 자랑스러운 침례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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