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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침례교-4(끝)

위대한 침례교 복음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1. 생애와 사역

20세기 전 세계 기독교권에서 강력하게 부상하였으며, 기독교 미래를 위한 최선의 대안으로 인정받는 현대 복음주의 운동을 형성하고 현실화시킨 사람은, 바로 침례교 목사이자 복음전도자인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18-)이다.

그는 191811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럿에서 윌리엄 프랭클린 그레이엄과 모로 그레이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빌리의 가족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는 연합 칼빈 장로교회에 출석했으며, 그는 10대 소년 시절에 한 부흥집회에서 회심을 경험했다.

빌리는 이후 미국 근본주의의 온상인 밥 존스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플로리다 성서신학교로 전학 갔고, 그곳에서 목회자로 소명 받게 됐다. 그는 20세였던 1938년 여름에 이스트 팰럿카 침례교회에서 생애 처음으로 부흥회를 인도했고, 그것을 계기로 침례교회로 교단을 옮기게 됐다. 그리고 얼마 후 침례교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빌리는 플로리다 성서신학교를 졸업한 후 시카고에 있는 휘튼대학교로 진학했으며, 그곳에서 부인이 될 루쓰 벨(Ruth Bell)을 만났다. 그녀는 미국 장로교 의료 선교사 넬슨 벨 박사의 딸로서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으며,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뒤, 휘튼대학교에 입학한 티베트 선교를 꿈꾸던 학생이었다. 둘은 1943813일 결혼식을 올렸다.

빌리는 토리 존슨(Torrey Johnson)과 함께 19456월 인디애나 주 위노나레이크에서 국제기독청년회(Youth for Christ, International)를 창설하고, 그 기관의 전임 설교자가 됐다. 이후로 그는 미국 전역을 다니며 설교하고, YFC 지부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1949년 로스앤젤레스 집회에서 대 성공을 거두게 됐으며, 이듬해인 1950년에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 BGEA)를 설립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5, “결단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라디오 방송사역을 시작했다.

라디오 방송은 엄청나게 성공했고, 그는 점점 더 국가적인 인물이 되어갔다. 1952년에는 텍사스 휴스턴과 미시시피 잭슨, 그리고 워싱턴 DC에서 집회를 가졌다. 워싱턴 집회는 30~50만 명이 참석했고, 그들 가운데는 많은 법조인들과 정치가들도 있었다.

그중 리처드 닉슨과 린든 존슨은 그의 막역한 친구가 됐다. 빌리는 1954년에 영국 역사상 종교집회로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역사적인 집회를 이끌었다. 이어서 독일과 인도에서도 선풍적인 복음전파의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미국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일부 그룹은 그가 복음주의 가르침을 세속화시킨다고 봤다. 특히 1957년 뉴욕집회가 근본주의자들이 반대하는 진영도 참가하는 에큐메니컬 부흥회라는 것이 드러나자 크게 분노하며 빌리를 그들의 그룹에서 배제시키기 시작했다.

뉴욕집회는 근본주의복음주의가 분명하게 갈리는 전환점이 됐던 것이다. 비판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흥회는 51518천명의 청중으로 시작됐고, 시간이 흐를수록 열기가 높아져서 원래 6주간 열릴 예정이던 집회가 5개월 더 연장됐다. 집회는 CBSABC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중계되었고, 미국 전역에서 뜨거운 호응이 일어났다.

빌리는 1958년 캘리포니아에서, 1959년에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1960년에는 아프리카의 9개국 16개 도시와 독일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동베를린 공산당의 방해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많은 동베를린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저녁집회에 참석했다. 1964년 부활절에는 앨라배마 버밍햄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그 집회는 미국 남부지역의 인종차별적 법안을 철폐하는 계기가 됐다.

빌리는 냉전시대에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복음을 전하는 커다란 성과를 남겼다. 19779월 헝가리를 방문했고, 197810월에는 폴란드에서 집회를 인도했으며, 19825월에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예수 복음을 설교했다. 이후 9년이 지난 19917, 그는 모스크바에 복음전도학교를 열었는데, 소련 전역에서 49백 명의 교역자들이 참석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와 회담하였고, 그것은 TV를 통해 방영됐다.

빌리 그레이엄은 1993년까지 약 18천만 명에게 복음을 직접 전했고,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라디오와 TV를 통해 복된 소식을 알렸다. 그는 1995316~18일 푸에토리코 집회를 170명 통역사들의 도움으로, 37개의 인공위성을 통해 전 세계에 방송하기도 했다. 그는 한 마디로 사도 바울처럼 일관된 복음전파자의 삶을 살았다.

 

2. 현대 복음주의 운동의 기수

복음주의자들이 근본주의자들과 다른 것 중 하나는, 복음을 지키는 것보다 복음을 전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근본 교리들을 믿으면서도 교파 간 신학적 차이에 대해 관대했고, 교리 논쟁보다는 전도하는 데 관심을 더 기울였다.

그리고 세속 학문과 문화를 거부하기보다는, 복음적 진리들을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 능력 있게 전파하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이러한 복음주의 사상이 기독교의 주요 흐름으로 안착되게 만든 사람이었다. 그는 성경의 권위, 인간의 죄성,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중요성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교파들의 폭넓은 연합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주장했다.

빌리는 복음주의 사상의 확산을 위한 연합적 회의체들을 만들었다. 먼저 1966년 베를린에서 세계복음주의회의를 소집하여 104개국 12백 명의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했다. 이 모임에는 복음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NCC, WCC, 그리고 가톨릭 대표들도 참석했다. 빌리는 비록 WCC의 자유주의와 세계교회주의 운동에는 반대했지만, 모든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1974716일부터 25일까지 150개국 27백 명의 개신교 지도자들을 스위스 로잔에 초청했다. 65명의 한국 대표들도 참석했다. 대회의 주제는 복음주의의 세계선교와 사회적 책임이었다. 결론은 복음전파는 사회참여보다 우선되어야 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들에 대한 관심도 중시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잔대회는 이러한 입장을 로잔언약으로 선포했다.

빌리는 1983년과 1986년 두 번에 걸쳐 복음 전도자들을 위한 대회를 암스테르담에서 개최했는데, 대회 명은 국제순회복음주의자 대회였다. 83년 대회에는 약 4천 명이 참석했고, 86년 대회는 173개국의 82백 명이 참가했다.

 

3.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빌리 그레이엄은 한국교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52년 한국전에 참가하고 있는 미군들을 격려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시즌 때 부산과 대구에서 집회를 열었으며, 한경직 목사가 통역했다. 1973년에는 세계교회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역사적인 한국 부흥회를 갖게 된다.

63일 주일날 오후,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112만 명의 군중 앞에서 설교했다. 수원중앙교회 김장환 목사는 뛰어난 통역으로 부흥회를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빌리의 아내 루쓰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연설하고, 빌리 그레이엄 전도팀 단원들은 한국 전역에서 여러 주 동안 복음을 전했다.

빌리는 또한 한국교회가 복음주의 운동을 조직화할 수 있게 일깨우는 역할도 했다. 총신대 총장을 역임한 김의환 박사는 빌리 그레이엄이 주도하여 만든 1974년 로잔대회가 한국 개신교 교단들을 복음주의 운동으로 묶어놓는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복음주의신학회가 로잔의 주장과 같이 복음전도와 더불어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신앙고백을 채택한 것과, 한철하, 김의환, 손봉호, 김명혁, 전호진 등 복음주의 학자들이 70년대부터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논문들을 본격적으로 발표한 것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총신대 교회사 교수 박용규 역시 한국 복음주의 운동이 사실 역사의 무대에 가시적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도 1973년 빌리 그레이엄의 서울 집회 이후였다.” 라고 했다. 빌리 그레이엄과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는 복음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에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의 설립을 후원했다.

 

4. 빌리 그레이엄의 성공 이유

빌리 그레이엄이 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주의 운동을 확산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섯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첫째는 기도와 성령충만이다. 그를 옆에서 항상 지켜보아왔던 디시전잡지의 편집자인 셔유드는 그의 성공 비밀은 성령충만이라고 단정했다.

둘째는 복음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을 들 수 있고, 셋째는 높은 윤리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적인 스캔들이 없었고 재정적으로도 흠을 잡히지 않았다. 기자들은 빌리와 BGEA의 약점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어떠한 비자금이나 흠결을 발견할 수 없었다.

넷째는 출판, 방송, 컴퓨터 등 대중 매체의 효용성을 알고 그것을 잘 활용하였다는 것이며, 다섯째로는 다른 사람들이나 단체들과 연합하여 일하려는 태도를 가졌다는 것이다. 교회사에서 사라지지 않는 별이 된, 복음전도자 빌리 그레이엄은 자랑스러운 침례교인이다.

 

김용국 교수 / 침신대 신학과(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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