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초실절(레23:11)
안식일 이튿날에 시작되는 초실절은 “제 팔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첫 열매되심을 정확히 “안식 후 첫날” 부활해 일어나실 것을 예시하심이다(레23:11). 이 날은 안식일이 아니다 “안식 후 첫날”이다(고전15:20). 예언되고 성취된 날 이날이 “주 예수의 날”이다. “주일”, “주의 날”(계1:10) 부활의 날이다.
4) 오순절(레23:15~16)
초실절의 날부터 칠 안식일의 수효를 세어서(7x7=49) “이튿날”(제 팔일)까지 합해 “오십일”을 채운 날이다. 즉 “하루“를 더한 이 “주의 날”을 합해야 오순절이 되게 하심은(안식일이 아님) 예수 그리스도로 또 다른 보혜사를 이 땅에 보내심의 언약이 완수 되게 하신 “더하여짐”으로 완성되는 “하루“가 “주의 날“이다(레23:15-16, 요14:16~21, 행1:4~5, 2:1~4).
5) 초막절(레23:34~38)
칠일동안 화제를 드리고 “제 팔일“에도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헌물 (외)에 낙헌 예물 (외)에 드리는 것이라(안식일이 절대 아님을 밝힘). 왜 이날을 “대회” “성회”라 했는가?(레23:34~38) 초막절은 한해 모든 절기와 행사의 끝이기도 하지만 이모든 절기행사의 의미와 뜻을 아우르는 “마지막 절기명절”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 끝에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어 세상을 통치하실 천년왕국의 그림자가 초막절의 의미이듯 이날은 장차오실 “예수그리스도의 날”이며 오실 그분의 “그림자 적” 사건임을 드러내기 위한 “날”이다.
예수께서 한해의 모든 명절 끝날 곧 “큰 날” “초막절 마지막 날“ 곧 “제 팔일”에 “대회”요 “성회의 날”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하셨다(요7:37~38).
이날이 초막절 끝날 “제 팔일”이었다. 이 선언은 에스겔서에 나타나는 “생명수의 강물을 흘려내실 성전”이심을 선포하심이다(겔47:1~12).
예수께서 자신이 모든 절기의 주인공 되심을 선포한 절기의미의 ‘끝’이며 ‘열매’시며 모든 ‘명절의 기쁨’을 아우르는 ‘절정’이 자신이 되심을 선포하신 외치심 이었다. 이 ‘날’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요 “제 팔일”의 날, 곧 “주의 날” 부활의 “날”이다.
이는 이스라엘(성도)을 애굽(세상)에서 이끌어 내어 자유케(하나님의 자녀 되게) 한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고 즐거워 할 것을 명령하심인 절기다(레23:39~43).
이는 예수그리스도로 ‘죄’와 ‘사망’과 ‘율법’의 ‘종’ 됨에서 자유케 하심을 기뻐하도록 하신 ‘자유’와 ‘승리’의 ‘기념일’ 이며 ‘속박’과 ‘억눌림’에서 ‘해방’되게 함을 기념케 하신 ‘생명’과 ‘부활의 날’, ‘승리의 날’, ‘기쁨의 날’이며 ‘영원한 승리’와 ‘영생의 근원’이 “자신”이심을 선포하심이다. ‘새 날’에 속한 ‘새 언약의 날’, 새 계명의 날, 새 생명의 날, 예수로 완성된 날, 자유의 날. 이날이 영원한“주의 날”이다(행20:7, 계1:10).
그러할지라도 주의 날을 꼭 팔일로 지켜야만 한다는 말이 아니라 주의 날이 그날일지라도 그날의 주인이신 예수를 중심에 둔 날로 지켜야지 안식일 주의자들처럼 날자와 요일에 얽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들어온 자는 모든 날이 새날이요 새 생명의 날이며 부활의 기쁨과 축제의 날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날이 천국의 생활 그 자체 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기 때문이다.
또한 구약의 안식일의 규정을 신약의 주일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주의해야 할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빌미가 된 율법적 안식일은 예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 새 생명 새 창조의 새 날을 여시고 새롭게 만드신 성도에게는 멍에로서의 안식일이 아니라 자유와 부활의 기쁨과 감사의 축제의 날로 축하하고 즐거워 할 주의 날로 지키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구약의 모든 교훈과 사건, 절기와 의식과 율례와 상징, 비유와 인물, 역사와 족보, 성막과 성전, 예언과 모형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 될 때 비로소 의미와 가치와 빛을 발하게 된다. 이는 성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자세히 알리시려고 구약의 모든 사건과 교훈과 비유 등을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기록하셨고 거짓과 이단에 속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만들어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핵심과 중심사상의 기초와 다림줄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는 세계와 우주와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 주관, 정사,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됐으니 그 분위에 성부 하나님 외에 어느 것도 올려놓을 수 없는 분이시다. 만물과 예수 그리스도를 저울에 달아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보다 무거울 중요한 어떤 창조물과 피조물도 존재 할 수 없다. 그분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우리 안에 거(내주)하고 동행하고(임마누엘)친구로 교제케 하셨으니 주 예수를 어찌 기쁘시게 할까? 주를 존귀케 높여 드리자.
사탄은 이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할 사상을 초점을 흐리게 하고 엉뚱한 것에 강조점을 두고 “논쟁과 관심”을 두도록 유혹하고 미혹한다. 안식일, 먹는 것, 마시는 것, 절기, 월삭, 조사심판, 지옥, 인치는 표, 등등의 허접스러운 지나간 율법의 초등 학문적, 몽학선생적인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에 골몰케 하므로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도록”(히12:2)방해한다.
바울의 견해는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이들이 “복음을 혼잡케” 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로 변론을 일으키고 믿음과 착한 양심을 버렸다고 말하며 그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다 했다(딤전1:3~4, 19~20).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예수)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3:5)했으며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고 했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4:2) 했으니 어리석은 말쟁이들은 물러가야 할 것이다.
6) 희년(레25:8~55)
희년은 기쁨의 해로서 칠년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다음 해 오십년 즉 “제 팔일”의 확대된“제 팔년”에 “오순절의 확대 된 한해 희년”에 해당된다(레25:8~55). 왜 칠년 곱하기 칠년을 하고도 ‘한 해’를 “더” 하라 하셨는가? 이 더하여진 ‘한 해‘가 예수 그리스도로 새롭게 시작되어질 새 언약, 새 역사의 시작인 예수의 그림자요 모형이다. 첫 창조에 속한 ‘칠일’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새로이 시작되는 ‘팔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재창조를 시작하심이다.
이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고 억눌리고 죄악의 포로 된 자들을 풀어 자유케 하고 슬픔을 당한 자들을 기쁘게 하시기 위하여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의 “예표”요 “그림자”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서 선지자 이사야(사61:1~3)의 글을 읽으시고 “이 글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심으로 “자기 사역의 시작”을 선포하셨다(눅4:18~21). 이것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하신 “희년의 선포”요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을 속이고 빼앗고 소경되게 하고 포로되게 하며 두려움으로 억누르는 사탄에게 슬픔 당한 자들을 부요케 하고 보게 하고 자유케 하고 기쁨으로 넘치게 하시고자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셨다(사61:1~3).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케 하려 함이요 인자의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하셨고 이 안식주의자들이 온 것은 성도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케 하려고 온 자들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명백하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선언하셨으며 전도서1:9~10은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창조하신 이가 새롭게 해야만 새것이 된다. 한대로 우리를 자기 안에서 새것이 되게 하셨다.
갈라디아서 6:15에는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라 하셨고 에베소서 2:15에는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신 새사람을 입으라 했다(엡5:24).
왜 하나님은 안식일 외의 날을 주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과 제도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분임을 나타내심이며 그 이상의 의미와 뜻을 나타내실 분임을 드러내심이다(요4:10~26).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조물주로서 만들어진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골1:16). 이는 마치 집을 지은 자가 그 집보다 존귀하기 때문이다(히3:3).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것들은 보이는 물질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비물질적인 것들과 (제도와 관습 영적인 것)보좌 주관 권세 만물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지어지고 만들어진 것에 비교 할 수 없는 존재시다(골1:16, 2:2~4).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는 지어진 만물의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거하셨을 지라도 부활 후에는 시간적 물질적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셨다(눅24:31~36, 51). 이는 지어진 첫 창조의 끝이 되시고 자기 안에서 재창조의 시작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골1:16, 고후5:17, 골3:1~4, 9~10). (첫 창조의 시작은 7일, 재창조의 시작은 8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어진 안식일에 매여 있거나 예속하여계시는 분이 아닌 묶인 자를 해방시키시는 분이시다. 안식일의 주인이며 안식일의 주권을 행하시는 이로서 안식일과 그 제도와 권위와 위엄을 폐하시기도 하실 수 있고 세우실 권세도 아울러 가지신 분이다.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심은 “안식일 위에 계시고 안식일의 권한을 마음과 뜻대로 하실 수 있으시다”는 “주권의 선언”이시다(마12:8). 그럼에도 “안식일의 주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안식일을 자기의 날을 삼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억측이요 궤변이다.
애완견의 주인에게 그 사람을 애완견에 속하여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라면 할 법한 논리실수를 계속 하는 것은 무지와 어리석음의 소치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성전이라 하셨다(마12:6, 요2:19~21). 성전 안에서는 율법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음은 성전이라는 특수한 영역인 주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 안에” 서라는 율법의 심판과 저주를 무력화 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 뿌려진 “언약의 영역” “믿음의 영역” 안에 들어온 성도는 율법의 모든 조항과 안식일의 규정과 제도에서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골2:12~17, 마12:3~21).
이는 “유월절 피 뿌린 집”(출12:21~23)과 “도피성”안에 들어간 도피자와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이 “율법의 심판과 죽음의 판결”에서 “생명과 자유”를 얻음과 같다(민35:9~35, 창7:6~24). 이러한 장소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적으로 그림자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요 교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지 제사제도나 절기나 안식일을 회복케 하려고 오시지 않았다. 오히려 불완전한 율법을 완성케 (그것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 하려하고 하나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을 실행케 하고 그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존재해야하는 것이지 병원자체를 위하여 환자가 존재한다 하면 안 되는 것과도 같다.
만물은 그분이 만드셨고 그를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케 하신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만들어진 것, “안식일”을 위해 안식일의 영광을 위해 오셨다고 고집한다면 안식일피조 된(만들어진 것)을 조물주(만드신 주체)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보다 위에 올려놓음이 되는 것이다(골1:16).
어리석은 억측과 궤변을 늘어놓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귀한 피조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시는가? 아니면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가에 대한 중대한 질문에 인본주의자들이 우주의 중심은 사람이며 하나님도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강변함과도 같은 어리석은 것이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됐다 (이사야43:7).
안식일을 마치 하나님처럼 높이고(창조의 계명이니, 구원의 표라느니) 주장하는 행위는 하나님위에 예수 그리스도 위에 바알 신을 올리고 숭배하는 우상숭배 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첫 계명을 범하게 되는 것이며 사단의 교묘한 간계에 속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줄로 착각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대제사장 서기관 사두개인 바리새인들과 같은 행위가 되는 것이다.
안식일의 논쟁을 그치라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후대에 세밀히 전달되지 못한 부분은 안식일과 주의 날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관찰하면 왜 예수님 당시 죽음을 당하기 전에는 안식일 준수 여부로 논란이 많았으나(마12:1~12, 눅6:6~11) 왜 사도시대의 사도행전과 그 후의 기록에는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전혀 기록이 없다. 레위기 23장의 내용을 살피면 그토록 날자와 안식일을 고집하던 이들이 공격을 철회 한 것도 아닌데 “주의 날”, “안식 후 첫날”을 지키는 초대교인들을 공격하거나 논쟁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 이유와 까닭이 이러하다.
이는 유대인들이 제 팔일을 구약의 율례를 따라 자연스럽게 절기 예식의 한 날로 지켜왔었음으로 ‘제 팔일’ ‘안식 후 첫날’이 충돌 없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임을 확실히 발견 할 수 있다.
안식 후 첫날이 ‘제 팔일’로서 제자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그 날 부활하셨고 다음 안식 후 첫날(요20:26) 다시 나타나심으로 계속되는 부활하신 주님의 출현이 그 날이 되므로 자연스레 기다리게 됐고 예배일이 됐으며 점차 주의 오시는 날 죽음을 이기고 왕의 왕으로 오시는 주의 날(계1:10 임페리얼데이, 왕이 방문한 날, NIV성경)의 의미가 확대됐다. 또한 “주의 가르치심”을 받고 “주의 날”의 의미를 제자들이 확실히 알고 지켰기 때문이다.
주 예수의 가르치심(행1:3)
부활 후의 예수님의 사십일 간의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강론하심으로(행1:3) 성경에 감춰져 있던 주의 그림자들을 깨우치셨으므로 제자들과 성도들이 잘 알고 믿고 있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엠마오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이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13~35) 했고
또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하시고 (눅 24:48) 기록됐으며 제자들과 오백여 형제가 사십일 간, 주로부터 성경의 예언과 선지자, 절기의 의미와 성막 성전, 율법과 교훈, 모형과 인물, 사건과 상징 비유와 성취가 예수님 자신임을 깊고 자세히 가르치셨다.
조의상 목사 / 은총교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