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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의식(比較意識)의 폐해((弊害)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고 어떤 어려움과 자존심이 무너지는 경우에도 참고 미래를 향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애쓰고 수고한 결과가 행복으로 이어졌을까? 만족을 하는가? 그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까? 그토록 소원하는 물질, 아니면 커다란 명예, 아니면 모두가 우러러 보이는 권력일까? 이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행복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소유한 그들 역시 또 다른 행복을 찾고 있다. 그들뿐인가 우리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지금보다 성도가 좀 더 있으면, 물질이 좀 넉넉했으면, 스트레스를 안 받았으면 하는 소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나름 나보다 좀 나은 목회자를 생각하고 그들을 부러워한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우리 모두는 언제까지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물론 불행한 마음으로 매일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 답을 모두가 모를 리가 없지만 그 답이 내 삶에서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사실 모두가 꿈꾸는 행복은 어떻게 보면 우리 가까이 있는 줄도 모른다. 아니 이미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남을 바라보는 비교의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C. S. 루이스는 마귀의 가장 좋은 도구가 비교의식이라고 했다. 비교의식은 그 누구라도 낙담시키고 침체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과 견주어 보는 것은 이웃을 평화와 친교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과 시기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이런 사람의 이면은 깊은 열등감이나 또는 성공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발산함으로 항상 갈등의 증폭된 의식에 휩싸여 있다.

스스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고단하여 쫓기는 삶, 매사에 불만이 많고, 경쟁의 심리에 압박 받으므로 긴장을 늦추지 않는 전투적 자세를 갖고 산다. 경계를 넘은 비교는 발전을 주지 않고 자신을 황폐하게 하고 실패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허탈과 허무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기에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몹쓸 병중의 하나다. 내가 비참해지는 이유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이고, 내가 교만해지는 이유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나으면 비참해지고,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나으면 교만해진다. 비참해지면, 자존감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 따라서 자신감을 잃고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된다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힌다. 일단 자신감을 잃으면 그 순간부터 자신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열등감, 우울증으로 산다. 남이 잘하는 것을 보고 시기심이 들거나 혹 감정적으로 눌린다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진다.

지금 이 나라에 미자립교회들이 상당하다. 목회자가 미자립이 아니라 교회가 미자립인데 어느 순간부터 일부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 눈치꾸러기가 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동역자들을 보면서, 또한 교인들을 보면서 슬금슬금 자기는 없어지고 가면(假面)을 쓰고 자기 아닌 자기를 앞세워 가는 경우들도 있다.


하나님이 한 개인을 창조하신 데에는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렇게 살 수 없는 상황 앞에 진정한 나를 버리는 그런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사실 그것이 예수님 말씀대로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엄한 명령에 따르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자랑할 만한가?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이 슬픈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사모님들도 마찬가지이다. 매일의 삶속에서 그래도 희망을 갖고, 소망을 가져보지만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는 살림과 상황을 보면서 어느 순간에 화살이 남편에게 돌리기도 한다.

2009, 영국 왕립경제협회 연차학술대회에서 이런 내용의 결론적인 보고서가 발표된 적이 있다. -비교의식이 클수록 만족도는 낮고, 특히 소득을 비교하는 사람은 질투심 때문에 두 배나 더 불행하다- 비교의식은 꼭 작은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비록 커다란 예배당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 담임을 하는 목회자 역시도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어느 통계에 보니 서울대생들이 열등감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왜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누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가? 많은 목회자들이 동료들을 만나고 난 후에는, 아내들이 동창회 갔다 와서 초라함을 느끼듯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마음고생을 하기도 하고, 초라한 마음을 가지기도 한다. 때로는 아주 순간이지만 목회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기도 한다. 마음속으로 나도 누구처럼 되어야지, 한번 제대로 보여주어야지, 그러나 그것은 설사 이루어 진다해도 또 다른 것이 나를 얽어 맬 것이고,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비교의식에 폐해는 우리 저변(底邊)에 널리 숨겨져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사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논리적으로 아니면 학술적으로 말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확실한 답이있다. 그답이히6:12절말씀이다.“ 우리의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우리는 보이는 것에 속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힘없게, 때로는 초라하게 재미없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교회도 내 자신도 보이는 것에서 영으로 자립(自立)이 되어 진정한 기쁨과 감사를 맛보았으면 좋겠다.

이규호 목사 / 처음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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