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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력(分別力) 인생

종자를 연구한 교수가 17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야생 들풀 100종과 4439종의 씨앗을 모아 종자은행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기사끝에실린그의말이중요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잡초는 없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잡초이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또한 잡초입니다. 상황에 따라 잡초가 되는 것입니다. 산삼도 원래 잡초였을 겁니다.”


사람도 꼭 같은 이치다. 자기가 꼭 필요한 곳,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 산삼보다 귀하다. 그런데 뻗어야 할 자리가 아닌데 다리 뻗고 뭉개면 잡초가 되고 만다. 주변을 살펴보면 타고난 아름다운 재능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잡초로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보리밭에 난 밀처럼, 자리를 가리지 못해 뽑혀 버려지는 삶이 얼마나 많은가? 영국의 경제학자 찰스 핸디(Charles Handy)의 저서 포트폴리오인생에 보면, 19세기 사람들은 쓰러질 때까지 일했다. 20세기 사람들은 은퇴할 때까지 일했다. 그러나 21세기는 시대가 바뀌었다.


전문성과 능력을 갗춘 포트폴리오 인생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자기 삶에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의 삶이 참 행복이라고 하였다. 우리는자기다움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창조할 수도 없다. 설계하지 않은 집은 지을 수도 없다. 자신이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이 되는 인생은 아무리 잘 살아도, 사실 자신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 각자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말 소중한 존재이다. 산삼이라도 잡초가 될 수 있고, 이름 없는 들풀도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 Dirty is out of the place”(더러움이란 자기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연못 속에서 커다란 고기가 헤엄칠 때에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 고기가 우리 침대 위에 누워 있다면 우리는 더럽다고 말한다. 아름답던 물고기가 혐오스러워지는 것은 그 물고기 본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논밭에서는 꼭 필요한 흙이 방바닥에서는 닦아내야 할 더러운 것이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주어진 자리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임의대로 버리고 떠날 수 없다.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견고함과 인내와 피나는 노력을 요구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은 제자리를 지키며 그 곳에서 맡겨진 역할을 충성스럽게 해낼 때이다.


우리는 내 자신의 위치를 바로 알아야 한다. 자기가 좀 뭔가 안다고 겸손치 못하게 남을 해치고, 교회와 공동체를 어렵게 하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볼 때 딱하기 그지없다.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살전4:6)“.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16:7). 왜 이런 모습들이 거룩한 총회를 어지럽게 하고 힘들게 만들고 있는가? 우리는 자기다움의 인식이 있어야 하겠다.


박쥐는 깜깜한 밤에만 활동한다. 어두워진 숲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박쥐는 잘 날아다닌다. 박쥐가 내는 초음파가 물체에 부딪쳐 메아리처럼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장애물도 무사히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 역시 어둠 속에서 특별히 그 빛을 발 할 수 있는 영의 초음파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영의 식별력(識別力)이 없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문제를 일으켜서 혼란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별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와 마귀의 소리를 구분 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미물인 벌레들도 바람의 언어를 읽는 더듬이를 가지고 있다. 땅속에 있어야 하는 시간과 알을 깨고 나오는 시간을 알며, 노래할 때와 일할 때의 경계를 분간할 줄 안다. 그래서 한자의 바람’()자에 별레“(?)자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뭇잎 하나의 흔들림에서 바람이 지나는 것을 보듯이 우리는 이 시대의 바람을, 내가 나서야 할 때인가? 아닌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성령의 바람인지 아닌지, 바람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개인도 교회도 총회에서도 바람을 보고 읽을 줄 모르면 풍향을 알지 못한 채 돛을 다는 뱃사공의 비극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런 때는 누군가 바람을 손가락질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가장 바람을 많이 타는 높은 장대 위에 올라야 한다. 그래서 바람닭은 지붕 위에서도 가장 높은 용마루에 꽂혀 있는 것이다. 과연 이 시대의 바람닭은 누구인가? 그 바람닭은 곧성령님이시다. 그분이 지시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건만 전혀 그 계시를 받지 못하는 인간은 한없이 답답한 문제 인생일 뿐이다.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싶고, 가까이서 손잡고 싶어서 선의의 표현을 했건만, 그 선()을 악()으로 만들고 만용과 교만으로 차서 마치 자기가 정의의 기사가 된 양으로 활개 치며 다니는 모습을 볼 때 행악자의 장래와 그의 등불이 꺼지리라”(24:20)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아무리 위대한 재능이 있다 할지라도 분별이 따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분별력을 가지도록 기도 했던 것이다. 진실한 것을 사악하게 대하고, 거짓인 것을 진실로 위장한다면 끝내 그릇된 소견이다.


()은 아무리 부서진 것이라도 결국은 머리에 쓰는 것이고, 신은 아무리 새것이라도 결국은 발에 신는 것이다. 물건은 쓰는 용도를 혼란시켜서는 안된다. , 아래의 구별을 혼란시키는 신앙의 삶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분별이란 목적과 수단 모두를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것을 판단하는 능력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 (All is not gold that glitters)

주여! 우리에게 지혜로운 분별력을 주옵소서

고흥식 목사 / 영통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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