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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심리학자가 본 동성매력장애

동성애는 죄인가, 병인가, 대안적 생활스타일인가?

오늘 밤, 그리고 새벽 3시에 나와 함께 이 시카고에 널려 있는 게이바 중의 하나로 갑시다. 여러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들 일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사랑받고 싶어 울부짖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우리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들이 사랑을 찾기 위해 종종 뒤틀리고 죄로 가득한 표현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야 할 굶주림, 마음의 외침, 공허함이 있으며, 여러분의 마음에도 내 마음에도 그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인 친구들이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책자를 휘두르는 전도사가 아니라 연민으로 친구에게 귀 기울이는 친구 말입니다.다른 어떤 것보다도 동성애자라는 사실로 갈등하는 사람,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간에, 그 사람은 사랑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그 혹은 그녀는 가족에게서 병자 취급 받아서, 왜곡된 환경 때문에, 혹은 우리들 누구에게나 영향을 끼치는 기본적인 죄로 인해 상처받았습니다.


희생자가 되는 것 이상으로, 동성애자는 죄의 희생자가 되어 왔습니다. 그는 그가 물려받거나 선택한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지는 나이가 되기 얼마 전, 알게 된 동성애 경향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종종 마지막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동성애 섹스를 하게 되는 그 사람은 사랑을 추구해왔고 그 사랑은 관능으로 더럽혀졌습니다. 그러면 왜 그 혹은 그녀가 기독교인 친구를 필요로 할까요?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있으며 속죄, 정화, 하나님의 사랑이 구현되는 치유력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화자에 따르면 적극적인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성()과는 관련 없이 양성의 돌보는 사람들과 연결됨으로 인해 대단히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민감한 대다수의 믿는 이들과 함께 하면 이러한 지지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교회와 기독교인 개인들은 번갈아 동성애 사람들과 더욱 연결되기를 원하고, 대화를 나누고 용납과 이해를 더욱 많이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동성애 우정이나 동성애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당사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될 수 있으며, 평범한 한 개인이 지지받고 용납 받아왔던 사람들로부터 멀어질 때처럼 이들도 똑같이 진정한 슬픔의 과정을 겪는다. 동성애를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지원 공동체가 없다면, 이들은 옛 생활 스타일로 쉽게 후퇴해버릴 수도 있다. 모벌리식 접근방식에 의하면 같은 성의 상담자와 가진 친밀하고 비성적(非性的)인 관계가 동성애자를 돕는 기본이 된다. 같은 성의 타인이 주는 사랑과 용납을 경험하면, 특히 그 관계를 기도로 지원하면 치유가 거의 가능하게 된다.

 

5. 행위 변화를 격려하라. 사랑과 용납이 있다 해도 다른 사람과 동성애 행위를 계속하는 사람에게 변화는 오지 않는다. 이런 행위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면 특히 그만두기 어렵다. 변하고자 하는 복잡한 결심이후에 내담자는 재발을 경험하고 때로는 변화가 바람직하다는 그러한 저항은 곧장, 인내심을 가지고, 친절하고 확고한 방식으로 상의해야 한다. 행위가 변하도록 돕는 방법 하나는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사람들, 출판물, 그리고 상황을 피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외로워질 수도 있고 상담이 주장하는 생활스타일 변화에 이를 수도 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며 성령님은 항상 유혹에 저항하고 죄악 행위를 저버리도록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내담자에게 상기시키라. 이 모든 일은 다른 사람이 계속해서 격려하고 인간적 접촉을 한다면 훨씬 쉬워질 수 있다.

내담자의 생활스타일 모두를 논의하는 것도 가치 있을 수 있다. 성은 삶의 일부지만 그러나 예배, , 가족, 기분전환, 시간 관리, 운동, 휴식도 삶의 일부다. 오직 성적 만족을 통해 삶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며, 상담이 성만을 고려한다고 해서 문제가 모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내담자가 성을 제외한 삶의 다른 부분, 예수님과의 관계, 교회와의 연관, 직장 혹은 기분 전환 활동 등등의 관련, 이런 부분에서 그 자신의 정체성과 만족을 찾지 못하는 한 압력이 생기면 다시 동성애 관계로 미끄러지는 경향이 있다. 보다 균형 잡힌 삶은 상식 특히 수많은 자잘하고 덧없는 동성애 감정과 행동의 치료다.

 

6. 상담이 복잡해지고 시간 소모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하라. 동성애는 복잡한 문제이며 종종 뿌리가 깊어 치료하기 어렵다. 특히 상담자가 이러한 그룹 사람들을 상담한 경험이 적거나 훈련을 적게 받았다면 더욱 그렇다. 당신이 시작하고 싶어 하는 지점과 내담자가 원하는 지점 사이에 전혀 연관이 없다면 진전은 없다. 모든 상담이 그렇듯이 동성애자들의 상담에도 기복이 있다. 다음과 같은 기복이 일어날 수 있다.


·실패 공포, 특히 피할 수 없는 재발 혹은 후퇴가 일어나는 경우. 내담자는 그런 일이 누구에게나 흔하고 상담자가 미리 예상하고 있는 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안심할 필요가 있다.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후퇴하는 사람은 공포를 느낀다.

·변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친숙한 것들에게로 돌아가려고 원한다. 이 일은 종종 친숙한 것들이 더 편안하고 따라서 변화를 원하기는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생겨난다.

·내담자로 하여금 옛날 행위로 돌아가라고 이끄는 유혹 때문에 불안이 생겨난다. 이 순간에는 다른 사람의 지원과 책임감이 중요하다.

·정점. 당분간 더 이상 진전이 없는 듯 보이므로 용기를 잃는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새로운 문제가 나타난다. 종종 하나의 문제가 나아지면 다른 문제가 갑자기 나타난다. 이런 일은 다룰 수 있다고 내담자를 안심시키라.

·새로운 감정의 나타남. 일부 내담자에게 이런 일은 두려운 일일 수 있다. 그 감정을 알도록, 왜 그 감정이 그 단계에서 나타났는지 그리고 정직하게 부딪치도록 내담자를 격려하라.

이런 일들을 써놓은 것은 당신의 용기를 꺾으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상담하는 일이 복잡하다는 경고이며 일부 경우에는 다른 사람, 아마도 더 경험 많은 이에게 소개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V. 기독교 치유 사역.

한국교회는 동성애자들을 성경적 관점에서 선교적 대상으로 품고 접근해야 한다. 그들도 은혜와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저들이 음란한 성정체성을 벗어나 치료받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동성애자는 변화될 수 있고 치유될 수 있다. “동성애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받고 치유될 수 있는 죄로 보게 될 때 동성애자에게도 희망은 있다.그렇다. 동성애로 갈등하는 사람들은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전환을 혼자서는 성취할 수 없다.

 

깊고 강력한 성적 정체감의 뿌리 때문에 순전한 자기 고취적인 노력만으로는 실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온전해지는 과정에서 그들과 함께 서주는 사람들을 신뢰할 뿐 아니라 오로지 그러한 분투를 창조주이자 구속자이신 분께 양도할 때에,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다”(리치필드, 2003).

교회 내에는 동성매력장애를 다루는 사역들의 수많은 그룹과 조직이 있다. 교회는 동성애자들에게 수용의 분위기와 지원의 분위기를 제공하여야 한다. 동성매력장애(SSA)에 대한 우리 해결책은 사랑과 이해이다. 모든 동성 매력 장애는 두 가지에 기반을 두고 있다:


(1) 치유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상처, 그리고 (2) 사랑과 용납에 대한 충족되지 못한 필요. 그 것뿐이다. 이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당신의 자녀가 진정한 성별 정체성을 되찾고 그녀의 이성애적 잠재력을 만족시키도록 치유 받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프로그램을 실천하려 노력하면 성공한다.


예를 들어 엑소더스 인터내셔널(Exodus International)은 사람들이 성적 경향을 바꾸도록 돕는 종교적 성향의 그룹 백 개 이상을 포괄하는 조직이다. 많은 그룹이 신문에 광고를 내고 변화한 사람들의 사례를 싣는다. 이들 일화를 담은 기사는 주목을 받으나 전문 상담자는 그 기사들을 깎아내린다. 사례란 거의 모든 종류의 행동 변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좀 더 종교적인 연구가 행해졌고 변화가 일어나지만 결과는 확정적이 아니다. 동성애 성향을 바꿀 수 있는 성공비율은 변하고자 하는 동기 여부에 따라 1/3에서 2/3로 본다. 이들 그룹의 일부는 그들이 동성애 경향 혹은 동성 매혹에서 극단의 변이를 무시하는 관점(그가 동성애자이거나 이성애자이거나 둘 중 하나)으로 혹은 한쪽 관점에서 일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동성애자에 대한 진정한 인권과 사랑은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 동성애의 실체를 바로 알려주고, 동성애가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돕고 섬기는 것이다.

동성애자를 사랑한다면서 동성애가 비윤리적이고, 비정상적이라고 지적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파멸에 이르도록 방임하는 무책임하고 잘못된 행동이다(양병희, 2015).

 

VI. 동성애에 관한 결론

하나님의 창조의도는 이성애였다. 이성애가 인간의 성적 결속의 역동성에 근거를 제공한다. 동성애 지향은 하나님의 창조의도와 이상에 미치지 못한다. 이성애 지향이든 동성애 지향이든, 사람은 동거, 불륜, 혼전 섹스(음행), 근친상간, 강간, 간음, 성매매, 수간 등 성적인 죄를 범할 수 있다.


복음주의적 신학의 성경해석에 의하면, 동성애는 명백한 죄이며, 동성혼도 아담과 하와를 위해 창조주가 만든 결혼제도가 아니다. 성경의 결혼관은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로 이루어진 이성애에 입각한 일부일처제이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의 결합은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결혼관이기도 하고, 성경적인 결혼관이기도 하다.기독교인을 포함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성 매력과 동성애 행동에 끌리는 유혹과 씨름하고 있는지 추정하기란 불가능하다.


거절당하거나 혹은 오해받는 것이 두려워 이 사람들은 그들의 경향을 인정하기를 주저한다. 종종 그들은 죄의식과 자기 비난에 사로잡혀 홀로 씨름하며 자신의 성적 사고 혹은 행동을 용서하거나 설명해줄 합리적 구실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교회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안전한 장소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의식 있는 상담자에게 게이와 레즈비언을 상담하는 일이 다른 유형의 상담과 그렇게 많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일은 복음의 힘을 응용해 상담환경 내에서의 삶으로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역사상 지금처럼 동성애에 관한 관심이 널리 퍼져 있으며 동성애에 대해 열려 있는 시대는 없었다. 예전에는 교회 구성원과 기독 상담자가 동성 매혹과 동성애 경향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성애는 기독교 성윤리에 도전이 되고 있다.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의 동성애자들의 성적인 죄는 이성애자들의 성적인 죄와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스타일과 관계없이 동성애자들을 하나님의 긍휼과 관심과 사랑의 대상으로 수용하고 인정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하나님의 신적 설계와 창조 의도의 관점에서 보면, 동성매력 장애는 불행하고 결핍된 상황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이는 성적 행동으로 표현될 때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다.


동성관계가 비록 이성간의 결혼에 대한 대안으로 용인될 수는 없지만, 복음의 기쁜 소식은 동성경향의 사람들도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그리스도의 교제권 안에서 금욕을 실천하는 독신자로서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독신생활로 부름은 받지 않은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는 가운데 성적 지향의 변화를 이루어 이성적 결혼 안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는 타락한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성경은 그것을 분명히 죄라고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정죄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창조질서 왜곡의 피해자로 여겨 따뜻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가 독선과 냉혈한적 태도를 가져선 안 된다. 동성애자들이 과거에 받았던 상처들을 보듬어주고 고민을 들어주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상담센터나 치료기관이 많이 세워져야 한다.동성애적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 그것을 즐겨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이성애자들이 성적 충동을 억제하고 순결을 지킬 것을 요구받듯이, 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리고 교회와 사회를 위해 동성애적 충동을 억제하고 삼가야 한다(김세윤, 2015).

어떤 성적 지향의 그리스도인이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성을 살아내라는 부르심은 오늘과 같은 허용적 사회분위기 속에서 어려운 도전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자원은 부르심의 어려움 보다는 크며, 창조질서와 의도에 순종하는 것은 더 큰 기쁨으로 가는 길이다. <>

정동섭 목사 / 가족관계연구소 소장, 강남중앙교회 협동목사

본 특별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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