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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땅’ ‘회복의 땅’ 우크라이나 도네츠크를 가다

/ 동유럽 통신원=박철규 목사


지난해 여름 한국을 방문하는 3개월 동안 선교센터의 게스트룸에 거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비타의 가정은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중에서도 러이사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슬로뱐스키와 마리우풀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마린카 근교에 작은 마을(꾸락호바)에서 거주했다. 그 가정을 통해 아들 지성을 동역자로 세워 이 지역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쿠락호바라는 마을은 키예프에서 동남부로 약 800킬로 떨어진 곳으로 도착하는 동안 3개의 검문소(controlpoint)를 지나야 했다. 무장을 한 군인(경찰)들이 통행차량을 검문했고, 신분증 검사와 방문 이유 등을 묻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통과를 시켜 줬다.


10여시간을 달리는 동안 느꼈던 것은 좌우로 펼쳐진 광활한 대지는 위대함과 함께 평온함을 줬다. 반면 작은 마을들을 지나며 언뜻 비춰지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없이 굳어 있었고, 한겨울의 자연과 같은 차가운 느낌이었다. 목적지인 쿠락호바에 도착해 동행한 비타의 안내를 받아 피난길을 떠난 한 가정의 처소에 여정을 풀었다. 25000여 명의 인구가 모여 살았다는 이 지역에는 현재 얼마의 인구가 유입되고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화력발전소는 있지만 가스가 중단된 상태인지라 가정마다 전기난방이나 화목난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인지 몰라도 도시 전체가 연기로 가득했고, 불내음으로 숨쉬기 편치 않았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불 냄새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창밖으로 내다 본 아파트 주변의 숲길에는 인적을 찾아 볼 수 없었고, 심겨진 나무들만 이땅을 지키듯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심의 중심에는 이른 아침부터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우크라이나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었기에 낯설지는 않았다비탸와 아내 율랴의 안내를 받아 15킬로 정도 떨어졌고, 포격이 계속되는 이웃 마을인 말린까라는 곳을 방문했다. 텅빈 유령도시와 같은 시내 중심에는 몇몇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 인적이 드물었다파괴된 건물들, 포탄의 파편에 부서진 집들, 움푹패여진 도로들, 절단된 가스관, 끊어진 전선들, 작은 양동이에 물을 나르는 젊은 부부-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미안해서 뒷모습을 살짝 담았다.


총탄에 부서진 베란다의 창문을 열고 담배를 머금고 있는 35살의 세르게이라는 청년. 20147월 첫 포성과 함께 39명이 사망을 했고, 그 이후에는 얼마나 죽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종됐는지 알 수 없었다. 부서진 건물들을 지나 고령의 할머니 두 분이 계신 아파트 쪽으로 가서 한참을 이야기 했다. 첫 총성과 함께 2주정도 이웃 마을로 잠시 피난을 다녀왔는데, 계속해서 떠나 있을 수 없어 다시 돌아왔는데, 그것이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되어 가고 있다며 눈물을 훔쳤다.

우리 아파트에는 이 할머니와 아들, 그리고 우리 두 늙은이, 두 가족이 전부야

큰 아파트 한 동에 이웃 할머니와 두 가정만 남아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났다며 울먹이셨다.


가끔씩 군인들이 나타나서 총을 쏘며 싸우기도 하고, 거리를 뛰어 다니기도 하지만 적군인지 아군인지 잘 모른다며 이제는 전쟁이 빨리 끝나서 떠났던 이웃들이 돌아왔으면 좋겠어라는 말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준비했던 작은 사탕과 과자 한 꾸러미를 손에 들려 드리고 돌아왔다. 상수도 시설도 모두 파괴되어 가끔씩 물 차가 와서 공급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공산주의 시절에 사용했던 마을에 설치된 기존의 공동 우물물을 이용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비타에게 예배드릴 교회(새생명교회)의 학생들을 모아달라고 했다. 그냥 그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고, 나누고 싶은 것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10명도 안된다고 하더니 피자파티를 한다고 했더니 20여명이 모였다. 그들 중 누구도 소망을 이야기 하지 못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냥 살아남는 것이 그들에게 최고의 꿈이었고, 중요한 일이었다. 어쩌면 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낯설고 사치스럽게 들리는 듯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나와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주일에는 교회 건물이 없어 여러 교회들이 시간을 나누어 예배 드리는 문화센터에서 60여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준비한 작은 식품과 선물을 받기 위해서 2시간의 예배를 끝까지 앉아서 기다리는 난민들은 대부분이 이번 어려움을 통해서 교회를 찾는 이들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들을 뒤로하고 다음날 새벽 일찍 키예프를 향해서 출발했다.


키예프에 이어 두 번째로 부유했던 도시 도네츠크, 지하 자원이 있어서 늘 부유했고 누리던 평안이 계속될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큰 변화였고 아픔이었다. 그리고 잠깐이면 다 끝날 줄 알았던 내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밤새 들리는 총성소리들은 너무 많은 것에 사람들을 익숙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침묵에 익숙하고, 없는 것에 익숙하고, 빼앗김에 익숙하고, 거짓에 익숙하고, 굶는 것, 더러운 것에 익숙하고, 총성소리에 익숙하고, 어둠에 익숙하고. 죽음도 이제는 별 것 아닌 일상이 되어 버린 듯 한 이들의 삶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빚어진 전쟁은 보여지는 건물들을 파괴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고, 아픔을 주었지만, 더 큰 것은 서로를 향한 불신과 잃어버림과 잊혀짐에 대한 아픔이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는 것이다. 가족이 흩어지고, 가족을 잃었고,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위로받고 일어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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