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복음서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이적기사를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통계가 나온다:
1)기사에 필요한 단어의 수
마태복음 157 마가복음 194 누가복음 153 요한복음 190
2)공관복음에 나오는 공통적인 단어의 수 : 53
3)요한복음에 나오는 공통적인 단어의 수 : 8
4)서로 같은 확률
마가와 마태 59% 마태와 누가 44% 마가와 누가 40%
마태와 요한 8.5% 마가와 요한 8.5% 누가와 요한 6.5%
위의 비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요한복음의 기사는 명확히 독립적인 기사이다. 요한복음은 꼭 필요한 단어만을 사용하고 있고 물고기라는 헬라어가 전혀 다른 언어이다. 그리고 공관복음은 서로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
2) 역사적 해석
복음서에 관한 역사적 해석은 저자와 그의 수신자, 역사-문화적 배경, 그리고 저술 목적과 동기 등의 측면에서 설교자로 하여금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네 복음서들은, 다른 저자들에 의해, 각기 다른 역사-문화적 배경을 가진 수신자들을 위해 기록되었으며, 독특한 계제(occasion)와 목적을 가진다. 이와 같은 상이점들의 불빛 안에서, 설교자는 복음서들이 매우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파악한다.
3) 알레고리적 해석 주의
특히 복음서에 빈번히 등장하는 비유에 관한 가장 정당한 해석은 다른 문학 장르를 해석할 때처럼 동일하게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전제되어야 할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은 진리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비유는 한 종류로 설명되지 않는다. 기본적인 차이를 비교하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진비유(眞比喩)이고, 떡 속의 누룩은 직유이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말은 은유이다. 그런가하면,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가시덤불에서 취하겠는가”는 경구(epigram)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진비유 또는 이야기 비유의 좋은 예이다. 순수한 이야기이다. 처음과 끝이 있고 플롯의 진행이 있다. 이러한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는, “잃은 양,” “돌아온 탕자,” “포도원의 일꾼,” “부자와 나사로,” 그리고 “열 처녀의 비유”가 있다. 그 외에 복음서의 메시지는 직유 혹은 은유와 같은 비유 형식의 글이 있다. 여기에서 주의 할 것은 결코 예수님의 비유를 세부적으로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알레고리로 풀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점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알레고리적으로 말씀하신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4:3~20)에 소개되고 있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설명은 다분히 알레고리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의도했던 그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것은 설교자(해석자)가 모든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유를 해석 할 때 알레고리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은 비유의 기능과 목적을 살펴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청중의 깨달음과 응답을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된 메시지였고 대체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비유를 해석하고자 하는 설교자는, 왜 이 비유가 예수님에 의해 제시되었는지를 물음으로써 알레고리적인 것을 비롯한 그릇된 해석의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4. 서신서 설교를 위한 석의적 관점
신약의 서신서를 장르적 맥락으로 파악하기가 비교적 쉬운 이유는 대체로 서신문은 수취인이 직접 받아 읽도록 집필한 문장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서신서의 내용이 단순하거나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서신서는 복잡한 해석학의 원리가 필요한 문화적이며 신학적(교리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1) 문맥을 통한 이해
정확한 서신문의 해석을 위한 가장 우선적인 관점은 문맥의 흐름 속에서 주어진 본문을 바라보는 것이다. 서신서 전체의 관점과 저술 목적 등의 관점에서 장별 이해가 필요하듯이 해당 설교 본문은 이러한 큰 문맥의 흐름 속에서 해석을 시도하여야 한다. 고린도전서 3:10~15는 문맥의 흐름을 차단할 때 해석상의 오류가 발생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두 가지를 고려하여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