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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수용

가정회복-8

우리는 크리스천이라서, 혹은 목회자라서, 혹은 집사라서 화를 내면 안 된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분노를 제거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다. 미국에서는 분노 때문에 사고가 나고 감옥에 가면, 의례 Anger Management 그룹에서 치료받거나 수업을 들으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의 조절에 관심이 많다.

분노를 다스리고 없애버리고 싶어 한다. 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한다. 실수를 저지르고 창피한 일이 생길까 걱정하고, 분노라는 감정을 한편으로 치워버리려 애쓴다.


이전에 내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 뒤에 숨은 많은 이슈와 감정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이제 이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분노의 감정이 우리의 상처에서 기인한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상처를 없애고 분노의 씨앗을 파내버릴까 고민한다. 그런데 그 첫 단계는 의외로 분노의 뿌리를 없애버리는 것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왜냐하면 분노하는 감정을 먼저 인정하는 데에서 분노 조절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니타 팀페는 분노는 나의 힘이라는 저서에서 역설한다. “화를 내는 모습은 모범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다기쁨이나, 슬픔, 두려움과 같이 아주 정상적인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분노는 부정적으로 평가되며 공동생활에서 터부시 되고 있다따라서 분노에 대처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저자는 분노가 우리의 자연스러움 감정의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다. 더구나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분노를 받아들이고 살피는 것이 분노 조절의 첫 단계라는 것이다. 분노를 무시하고 부정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래야만 분노와 행동 사이에 거리를 둘 수 있다고 말한다. 분노에 지배당하지 않고 분노를 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분노는 많은 경우에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하는 좌절에서 오고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 생길 때 생기는 당연한 감정이다. 아니타팀페는 감정을 조절하는 방식에 있어 부모의 모델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한다. 아기들이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울어서 거리낌 없이 화를 표출한다. 부모를 화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가 아기의 신호를 계속 무시하거나 처벌하면 아기는 자신의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조용하고 얌전하게 크겠지만 자신의 감정 표현을 못하는 아이로 자랄 수 있다. 반면에 아이를 때리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부모를 보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분노를 긍정적으로 표출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분노와 공격성에 대한 적절한 대응 방법은 찾지 못한다.

저자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표출하지 못했던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분노를 해결하지 않고 몰아냈기 때문이다.”


B씨는 자주 동네 사람들과 싸우기도 하고 공관서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누군가 자기 자리에 차를 대면 욕을 하고 달려들었다. 차에 심한 욕을 써서 붙여 놓기도 했다. 내 차례인데 다른 사람이 먼저 서비스를 받는 것 같으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쳤다. 다 화가 날 만한 상황이기도 했지만 B씨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계속 해서 상대를 최대한 기분 나쁘게 공격했다.


이 분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 분노는 현재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어릴 때 출생 자체가 불공평했다는 것이다. 전쟁을 거친 부모의 세대에서 그의 아버지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둘째 부인의 자녀로 태어난 그는 다른 친척의 호적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명석하고 똑똑했지만 아버지에게는 우선순위가 되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학비를 받아오라고 큰 집에 보내진 B씨는 배다른 형제들의 수모와 아버지 첫째 부인의 차가운 냉대를 받으며 마당에 한없이 서 있었어야 했다. 어릴 때의 그 기억은 B씨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심과 억울함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 자신을 불공평하게 대하거나 자신의 영역이나 물건을 건드리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의 안에 있던 상처받은 작은 아이가 계속해서 분노하고 있었다.


심리학에서는 성인아이의 개념으로 상처받은 과거의 자신을 설명한다. 상처받은 그 상황에서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한 아이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이 아이는 감추려고 할 수록 예견할 수 없는 순간에 튀어 나온다. 잊으려고 할수록 더 강도 있게 반발한다. 내적치유에서 첫 번째 과정은 그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 안의 상처와 분노를 받아들이는 데에서 치유가 시작된다.

분노하는 내 안의 그 아이를 계속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함께 앉는 것이다.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그 아이가 화내고 슬퍼할 때 잠잠히 받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육신의 부모에게서 듣지 못했던 말들을 자신에게 해주는 것이다. “다알아그래, 화 날만도 하지.” 그런데 그 말 한마디에 우리의 잠재된 분노가 스러지는 경험을 한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하신다. 시편기자들이 수도 없이 분노와 억울함과 두려움과 슬픔을 쏟아 놓을 때 다들으셨다. 그리고 우리가 쏟아내는 분노와 아픔과 슬픔들을 안다고 하신다.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해 이미 체휼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망가지고 부서진 우리 옆에 함께 하신다.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조건을 붙이지도 않으셨다. 부서진 우리를 은혜로 감싸 안으신다. 그런데 그 고통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회복을 경험한다.


분노하는 아이를 내 안에 꼭꼭 숨겨놓지 말자. 그 때는 아무도 해주지 못했던 수용과 위로를 이제 우리 스스로 해줄 수 있다. 상처받은 그 아이를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주어야 한다. 위로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 아픔에서 벗어나 자라고 성숙해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분노의 조절은 수용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분노는 밀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고 들여다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셨던 구원의 은혜이다.

 

/심연희 사모 RTP지구촌교회(미주)

Life Plus Family Center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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