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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부활인가?

김선배 교수 / 침신대 신학과(신약학)

뜻밖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던 제자들은 신앙생활에 힘쓰는 대신에 디베랴 호수로 간다. 부활의 증인인 제자들은 그곳에서 밤새 그물을 던진다. 그런데, 이랬던 제자들이 예수의 승천 이후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바로 이 제자들이 예수의 증인이 되면서 기독교 역사가 펼쳐진다.


우리는 이미 시작된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 시대의 한 부분에서 같은 종말론을 소유한 가치 공유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속해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파괴를 예고하시면서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신다(마 24장, 막 13장, 눅 21장). 역사적으로 실현된 예루살렘의 재앙과 성전 파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성취 과정을 미리 체험하게 한다. 줄의 한편 끝을 잡아당기면 이어진 다른 끝부분이 당겨져 오듯이, 우리 시대는 이미 실현되고 있는 종말의 궤도에 놓여있다. 상상 그 이상의 격변인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시대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과 자신의 부활을 믿는 믿음의 힘으로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한다.


1.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로마서에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서로 구분하는 듯한 표현이 있다(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물론 표면적으로는 순차적인 과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단계별 구원 과정 제시나 해석이 아니다. 바울 서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어떤 한 가지 사실을 다양한 용어로 반복하여 표현하는 점이다.


이와 같은 다른 사례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 10장 10절의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와 같은 내용이다. 이 구절의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단계별로 성취되는 구원의 과정이 아니다. 또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별개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전인격적인 회심을 영과 육을 분리하던 당시의 헬라 문화의 이원론 구조로 설명한다.

로마서 5장 9절과 10절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구원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내포하는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 화목하게 되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을 다양하게 표현하며 강조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법률적인 용어인 의롭게 되는 것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관계적인 용어인 화목하게 되는 것이 적절한 이해의 방법일 것이다. 이는 구원의 복음에 대한 다양한 전달 방법의 사용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4장 25절을 근거로 십자가의 죽음은 속죄이고, 부활을 구속이라고 구분한다면 이는 로마서 신학의 특징을 오해하는 것이다.


2. 재림의 지연으로 흔들리는 신앙
그렇다면 대표적으로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는 어떤 의미로 여기저기에서 부활을 강조하고 있을까? 예수의 승천 이후에 많은 사람은 예수의 재림이 곧 발생할 줄 알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육체적인 죽음을 겪지 않고 예수의 재림을 경험할 줄로 알았다. 특히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천사의 설명에 대한 오해는 이에 대한 기대를 부풀렸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참조, 마 26:64; 막 9:1; 13:30; 눅 21:32; 요 21:22-23). 특히,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임박한 예수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기대가 신약교회의 상황에서 널리 퍼진 것을 보여준다. 갑자기 다시 오실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임박한 종말론으로 인식되어 생활의 무절제가 발생했고, 이에 대해 데살로니가후서가 예수의 재림 전에 징조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면서 종말을 기대하는 그리스인의 정상적인 삶을 가르친다.


임박한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기대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이끌어주던 동력이기도 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는 제도화된 교회나 조직 대신에, 이들의 형성 이전에 신앙의 중심을 잡아주던 힘이었다.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지금의 신약성경의 형태로 기록하거나 보존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상황이 현실을 일깨웠다.


현실의 악을 제거하면서 승리의 주로 다시 오실 줄로 알았던 예수는 오시지 않고, 대신에 변절의 유혹까지 불러오는 강한 핍박과 박해가 쏟아진다. 멸망할 것 같던 로마는 점점 융성해지며 그 권력의 힘은 고대 세계의 바벨론을 뛰어넘을 정도였다(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벨론이 로마를 상징한다). 설상가상으로 예수의 최초의 증인들이 죽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동료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예수의 재림 대신에 배교의 위협과 혹독한 박해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기대와 다른 상황은 심판의 주로 오실 예수의 재림에 대해 갈등과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예수의 재림이 실현되는 것 같이 현실의 세계에서 평화가 이루어지며 악은 쇠하고 신앙의 영역이 확장되어야 하는데, 이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상황이 세상의 종말과 예수의 재림에 대한 의구심을 낳은 것이다. 정말로 예수는 승리의 주로 다시 오시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가 악의 세력에 패배해서 이 세상이 더 악해지는가? 이러한 회의와 갈등이 퍼진 것이다.


3. 예수의 부활, 그리스도인의 부활
고린도교회는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될 때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교회이다. 사랑과 정욕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비너스)의 영향 속에 있던 고린도에 선포된 복음은 이 지역의 종교, 문화, 윤리 등의 상황과 충돌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 이 가운데 특히, 기대했던 대로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예수 재림의 지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때 예수의 부활은 육체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설명해준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육체로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의 재림을 경험하지 않고 죽는다고 해도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한다(요 11:25-26).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근원이므로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어도 영원한 부활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바로 생명의 영속성이다(요 5:27-29).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의 내용처럼 부활에 대한 강조의 중심이 예수의 부활에서 그리스도인의 부활로 옮겨진다.


15장은 헬라 문화의 죽음 저편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존재의 지속성이나 환원적인 삶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출발점과 근거로 한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강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물질세계의 원리를 들어 구체적이며 명확하게 설명한다. 이러한 부활 신앙이, 흔들리던 예수의 재림과 세상 종말에 대한 기대를 확실하게 보증했다. 예수의 부활은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직결되면서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이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희망을 주었다.


4. 부활이 예수의 죽음을 다른 죽음과 구별하는가?
예수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 부분이다. 성경에서 어떤 한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다른 요소들을 모두 배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이며, 성경 내용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주제와 연관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들을 나열하면서, 이 나열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이 성경 구절들의 본래 의미와 신학적인 특징의 끝을 다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성육신, 고난,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실재이며, 부활은 이러한 실재의 한 부분이다.


성경에는 치명적인 질병 치유를 비롯해 죽은 자가 살아난 기적들이 소개된다. 나사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 야이로의 딸, 다비다(도르가), 유두고 사건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는 예수의 권위를 비롯해 베드로 및 바울과 함께하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준다. 특히 나사로의 부활은 극적이다. 죽어서 무덤 속에 있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시신의 부패한 냄새가 나던 상황이었다. 성육신의 절정을 이루는 십자가의 죽음은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죽음일 수밖에 없다. 예수의 죽음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죽음이므로 모든 인간의 죽음과 같은 죽음의 형태이다. 그러나 이 죽음은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의 죽음이 오직 부활로 다른 죽음과 구별되는 것보다는 성육신 등을 통해서 다른 죽음과 구별된다.


5. 천상의 제사와 지상의 제사
히브리서는 유대교의 배경 속에서 박해와 핍박으로 배교하거나 변절하려는 대상들에게 주는 한 편의 설교문과 같다. 하늘의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성취되었으므로 과거와 미래가 모두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 포함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히브리서는 구약의 제의 개념으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한다(히 10:12). 히브리서는 이원론 구조로 천상의 제사와 지상의 제사를 비교한다. 즉, 구약의 제사는 천상의 제사의 모형(모조품)이라는 구조로 구약의 제사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를 기초로 또 다른 이원론의 구조처럼 구약의 제사 및 제물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한다. 예수는 구약의 어떤 제사나 제물보다 뛰어나신 분이며 구약의 모든 것을 완성하신 분이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림자나 모조품과 같은 구약의 신앙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히브리서가 전한다(8:1-5; 9:11-15, 23-24).


로마서 5장 14절은 아담을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아담을 예수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아담 편에 속한 사람이 죄인이듯이 그리스도 편에 속한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의미를 제공하는 비교이다(고전 1:22, 45). 히브리서 8장 5절(9:23)의 모형도 이와 유사하다. 히브리서는 영적이며, 하늘에 속한 일들을 물질적이며 지상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그래서 바나바스 린다스(Barnarbas Lindars)는 “모든 제사 제도들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들(copies)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들의 불완전성(inadequacy)과 비영구성(impermanence)을 지적하여 재 상기시키려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이라는 이원론적인 구조로 구약의 제사를 말하면서, 하늘에 속한 제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유대교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말고 영원한 제사와 제물이며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안에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부활하신 예수보다도 승천하신 예수를 강조한다(히 4:14; 10:12).


 6.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재림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부활!
이스라엘의 기독교인 관련 영화에서 한 유대인이 다음과 같은 의미의 질문을 한다. ‘어떻게 이천 년 전에 죽은 자가 현재의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미 죽은 자는 현재의 구원자가 될 수가 없다는 생각으로, 이러한 질문의 내면에는 ‘예수가 부활하셨다면 그 예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문일 것이다. 성육신 하신 예수의 죽음의 신학적인 성격을 배제한 유대인들은 그의 죽음을 단지 한 인간의 죽음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부활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구속 사건의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서로 분리되어 균형을 이루는 요소가 아니다. 이미 십자가의 죽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완성되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11절은 빌립보서가 기록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진 찬송시이다. 여기에서 가장 기본적인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기독론을 찾을 수 있다. 이 찬송시의 주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를 비우심과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다.


골로새서 1장 15-22절도 마찬가지이다. 케리그마 중의 케리그마라고 일컬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예수의 생애와 사역 전체가 균형 있게 압축되어있다(행 10:34-43).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성육신의 완성이고 사명의 성취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마지막으로 선언하신 말씀은 그의 사명의 성취를 의미하는 “다 이루었다”이다(요 19:30). 기적을 표적으로 기록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부활은 그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표적이다. 당연히 표적 자체가 아니라 표적이 지향하는 의미가 초점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성육신, 생애, 고난, 죽음, 부활, 승천, 재림 가운데 이 모든 것을 압축하는 십자가의 죽음과 이 죽음의 표적인 부활이 신약교회의 상황에서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대표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를 여러 신 가운데 한 분의 신으로 추가할 수 있는 다신교와 혼합종교 상황에서 예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선포이다. 특히, 이원론의 구조로 죽음 이후(저편)의 세계는 인정하면서도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던 헬라 문화의 상황에 맞서는 예수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다가올 심판의 날에 발생하는 영원한 생명의 선포이다. 또한, 죽은 자가 현재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인식, 임박한 종말론에 의한 혼란, 이와는 상반되는 것 같은 재림의 지연 상황에서 박해와 핍박에 의한 배교와 변절의 위험, 주변 그리스도인들의 죽음 등이 어우러진 상황이 예수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강조하게 하였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는 종말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보증하면서 이들이 낙담하지 않고 굳건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도록 만드는 핵심이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의 현재성과 영속성이 그의 부활로 증거되고, 이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에 대한 확증으로 연결된다.  예수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박해와 핍박을 당하거나 죽음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재림 및 세상의 종말과 심판에 대한 확증(행 17:31-32)을 갖고 굳건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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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