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주일 예수님의 명칭을 여러 가지로 부르며 듣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 헬라인들은 ‘그리스도’ 영어권에서는 ‘세이비어(Savior)’ 그리고 우리는 ‘구세주’라 부릅니다. 우리가 ‘구세주’라고 부르는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어떻게 약속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기 위해 우리는 누가의 기록에서 칭찬한 젊은 설교자 아볼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능통한 자라”(행 18:24)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기니라”(28)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받아들이게 하는 능력의 근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성령님’ 그리고 그분께서 감동하여 기록된 말씀 ‘성경’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리 예언되어진 약속의 ‘메시야’를 증거 하는 사명을 불안해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말씀의 일부분만 알고 전하다보니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대교회는 프로그램과 계획들로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메우려고 동분서주 합니다.
우리는 예언되어진 메시야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께서는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우리가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선지자의 예언을 얼마나 설교하며 가르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자문해 봐야 합니다.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설교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교훈과 혼합되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오직 예언의 말씀이 설교되어야 합니다. 예언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이 선포한 약속의 말씀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옛적에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부르실 때에 왕의 궁전에 있는 지혜 자들로부터 벽촌에 사는 농부와 목자들을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특성은 오직 믿음과 성실함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무엇이나 다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록하라고 하신 말씀을 일점일획도 놓치지 않고 기록했으며 증거 하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천사들도 살펴보기 원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메시야’를 세 부분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아브람까지, 두 번째,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까지, 세 번째, 모세로부터 말라기 선지자까지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아브람까지는 긴긴 세월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까지입니다.
여기는 약 400년의 시간이 흐릅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할 약속의 말씀은 창세기 12장3절의 약속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약속은 모세로부터 말라기 선지자까지입니다. 이 기간은 약1,100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행 3:24)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는 모든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되었고 그 약속하신바대로 처녀의 몸을 빌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분이 바로 우리의 ‘메시야’시며 그리스도이신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기독교 이전에 메시야에 대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메시야께서 오시기전 우리 인류는 세 집단이 있었습니다. 첫째 유대인, 둘째, 사마리아인, 셋째,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세상은 다섯 가지 문제로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질병, 전쟁, 불평등, 죄, 죽음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들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는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메시야’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아래 있었는데 그들이 받은 은총은 성경을 기록했고 하나님의 ‘메시야’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분명히 세 가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다는 것과 그분의 사역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메시야가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예언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매했습니다. 그 이유는 메시야 안에 있는 그분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몰랐기 때문입니다.(마 1:21)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심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Before Abraham was born, I am.)”고 하셨고 그분이 친히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메시야, 그리스도, 세이비어, 우리 구주께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대로 오신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 이정일 목사 청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