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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잃은 곳에서의 저항

/ 계인철 목사 광천중앙교회

유럽의 중세의 밤은 꽤나 길었다. 우리가 소위 중세 암흑기라고 부르는 약1천년의 신(God) 중심과 봉건제도라는 거목을 쓰러뜨린 것은 신에 대하여 질린 반발심이 개인의 창조성을 추구하며 고대 그리스 시대로 돌아가자고 깃발을 높이 들고 등장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다.

중세에서 근세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2세기에 걸쳐 시대정신이 되어 준 문예운동인 르네상스는 마치 스위스 천문학자 트럼플러(Robert Julius Trumpler)가 주장했던 성간물질’, 즉 은하계의 별과 별 사이에 빛을 가로막는 알 수 없는 장벽 같은 물질이었다. 중세의 밤은 하나님도 성경도 없는 암흑의 밤이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천장 높은 성당에서 장엄한 성가와 미사가 드려졌지만 하나님을 배신한 자들이 종교적 충족을 위해 사치와 허세를 부릴 뿐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르네상스는 이러한 벽을 허물어뜨리는 괴력을 발휘하며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제거하는 또 다른 괴물로 성장해 근세로 걸어 들어왔다. 신학, 철학, 법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의 자아를 여과 없이 분출시켰는데, 그중에는 시대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라파엘로 산치오(Sanzio Raffaello)가 있었다. 그는 교황 율리오 2세의 요청으로 바티칸 교회의 서재인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에 그 유명한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이라는 철학을 상징하는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다.


라파엘로는 54명의 철학자를 화폭 안으로 초대한 다음 그 중앙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걷게 하면서 그 둘의 중심 사상을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설명한다. 플라톤의 손가락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은 땅을 가리킴과 동시에 두 사람이 들고 있는 책을 통해 학문적 차이와 사상을 설명하려 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를 통해 영원의 이데아, 즉 이상을 뜻하는 것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문제를 다른 니코마코스 윤리를 통해 현실을 중시하는 상징으로 땅 쪽을 가리켰다. 하늘과 땅, 이상과 현실 중 어느 방향을 가리키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가진 세계가 드러났다.

지금 대한민국은 방향을 잃었다. 저마다 방향을 외치지만 제대로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은 없는 듯하다. 마치 도로의 오거리처럼 서로 자기가 가리키는 방향이 옳다고 손가락질하며 나름대로 중력을 발휘하려 한다. 그 사이에서 국민은 덩달아 흥분하며 길을 잃고 있다.


촛불로 가야할지 태극기로 가야할지, 방향(方向)이 아닌 방황(彷徨)을 정상으로 착각하게 한다. 군중이 진리가 아님에도 군중의 논리를 따르고,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없음에도 숫자 놀음에 모두 미쳐있다.

대권을 향하는 이들의 소권적 사고는 국민을 적당히 속이며 있지도 않은 파랑새를 선물한다. 상식이 허물어진 가운데 찢겨질 대로 찢겨진 마음에서 여전히 피는 흐르는데 눈길은 국민 몰이하는 대권 주자들에게 쏠린다. 저마다 정의를 외치지만 객관적 정의는 실종되고 온통 주관적 정의를 목이 터져라 외쳐댄다. 여기에 정작 이 사회의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바른 인도를 해야 할 교회들마저 덩달아 춤을 춘다.


피리를 분다고 무조건 춤을 추워야 하는 것인가? 반주가 나온다고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하는 건가? 춤도 좋고 노래도 좋은데, 추워야 하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올바른 분별의 과정을 거친 후에 춤도 추고 노래도 불러야 하지 않는가? 바리새인을 떠나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다시 예수를 버리고 바리새인들을 쫓았던 군중 기독교의 모습은 아닐는지, 오늘의 교회의 모습은 지극히 성경적 모습이라기보다는 세속적 모습을 기독교적으로 포장을 해 놓은 무력한 공룡에 지나지 않는다. 9백만이 넘는 종교인구를 가졌다고, 이젠 기독교가 한국 땅에서 1등이라고 말도 안 되는 자만감에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려 하지만 지금 기독교는 이 땅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한 존재 아닌가? 갈등하고 대립하는 공간에서 또 다른 갈등과 대립을 발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가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라는 저서에서 외친대로 아무리 기독교를 열심히 믿는다 해도 각자의 삶이 그대로라면 의미가 없다.

그 책의 부제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가 아닌 새로운 생활의 이해다처럼, 기독교는 신비만을 간직하고 그 신비에만 몰두해서는 안 된다. 삶의 변화, 진정한 진리를 따르는 삶, 즉 생활로 나타나야 한다.

군중으로 몰려 저항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찬양대 복을 입고 저항하는 일련의 퍼포먼스도 필요한지는 모르지만, 이 시간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소금같이 말씀을 묵묵히 삶에서 실천하는 저항이다.

예수가 살았던 삶, 그 삶을 그의 제자 된 교회는 오늘날 살아내야 한다. 성경적 삶으로의 저항을 해야 한다. 그래서 빛이 되기보다 소금이 되는 것이 먼저다.


우리가 잘 아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보다 먼저 소금을 말씀하신 것에 대한 깊으신 뜻을 헤아려야 한다.(5:13-116) 소리치는 빛, 보여주는 빛이 아니라, 조용히 녹는 소금, 말없이 희생하는 소금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의 첫걸음이다.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3장에서 톨스토이가 산상수훈인가, 사도신경인가를 통해 교리적인 것이 아닌 삶, 즉 생활의 가치를 제시한 것처럼 이제 교회는 진정한 성경적 삶이 있는 생활들로 방향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이 사회와 악을 향하여 저항해야 한다.


더 이상 천적 때까치앞에 움직임을 잃은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 사는 도마뱀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도리어 로마시대 성도들처럼 오직 예수와 그 말씀의 삶으로 저항하여 이 땅을 치유하며 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교회가 먼저 바른 방향인 예수에게로 완전히 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거룩한 모양으로 예수를 오늘도 배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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