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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흘리기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

/ 조범준 목사 영진교회

1년 시절, 우리 반에 일진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누구도 그들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 반은 평화가 유지됐다. 그것은 또 다른 세력 때문이었다. 또 다른 세력은 다름 아닌 범생파들이다. 범생파, 공부 좀 하는 애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두 세력 간에는 암묵적 약속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적어도 우리 반 애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 왜냐하면 우리니까! 그리고 일진들에게 잔소리하지 말 것 등이다. 그런데 이 평화가 위협을 받는 날이 왔다.

내가 읽던 책이 너무 재미있다며 그 일진이 책을 빌려 달란다. 다 읽고 빌려주겠다는데도 막무가내다. 결국은 점심시간에는 내가 읽는 걸로 약속을 하고 책을 빌려줬다. 그런데 점심시간 종이 울렸는데도 책을 줄 생각을 안 한다. 아마도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였던가 보다. 조금만 더 읽고 줄 테니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다. 일진이 말이다. 그 정도라면 양보해도 될 텐데 도무지 양보하고 싶지 않다. 왜냐면 이것은 양보를 가장한 침탈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내놔라’, ‘읽고 주겠다’, 이렇게 시작된 실랑이는 내 말 한마디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것은 엄연한 약속이다. 네가 만일 남자라면 약속을 지켜라!”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권투를 했던 아이다. 그러다 보니 몸의 근육도 남달랐고 주먹도 날쌨다. 사춘기 아이들의 눈에 그는 영락없는 남자였다. 그런 그에게 남자도 아니라는 뉘앙스의 말을 했으니 성질 급한 그 아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피할 틈도 없이 날아온 주먹은 내 입술을 정통으로 강타했고, 찢어진 입술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덩어리째 떨어졌다. 모두가 놀랐다. 때린 그도, 맞은 나도, 보는 아이들도. 피를 보면서 그 아이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한마디 던졌다. “책 내놔!” 그리고 책을 돌려받았다.


이미 그 아이는 책에는 관심도 없었다. 더 이상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빨리 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던 그는 나더러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나는 약국에서 지혈제 바르고 항생제를 먹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문제는 종례시간이다. 입술이 퉁퉁 부은 나를 보고 담임 선생님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셨을 때 나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장난치다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혀서 그랬노라. 그러자 그 녀석이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나를 향해 엄지를 척 세운다. 그 뒤로 그는 나의 보호자 아닌 보호자가 되었고, 나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그에게 할 수도 있었다. 충고랄까 이런 거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누가 봐도 완벽한 나의 승리다. 피 흘림으로 얻은 값진 승리! 주먹이 두려우면서도 고집을 피웠던 이유는, 힘이 없다고 할 말도 못하는 비겁함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가끔은 아픔을 겪기도 한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고,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막무가내인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이 원칙을 지키려다 보니 어떤 때는 간접적인 공격을 받기도 한다. 내게 대놓고 말하면 나도 설명을 하거나 해명을 할 수 있으련만, 대개의 경우는 뒤에서 악성 루머를 만들기 일쑤다. 그렇다고 들은 말을 가지고 따질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진실은 가려질지 모르나 그로 인해 다치는 것은 선한 교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고도 모른 척하고 참아내는 것이다.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덕이 되는가이고, 덕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이다. 그래서 참아내야 하는데 어떤 때는 참으로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가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이렇게 피 흘리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것, 그것은 목회의 가치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닌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 그리고 영혼을 살리는 일, 그것 때문에 피 흘리기까지 참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새로운 힘이 생긴다. 1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등굣길에서 2학년 선배가 괜히 시비를 걸었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안 했는데 말이다.

억울했지만 힘없는 1학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너무 억울해서 다음날 동네 선배에게 이 일을 고했다. 동네 선배는 3학년이었다. 다음날 등굣길, 어제 나를 억울하게 한 선배와 마주쳤다.


그러자 동네 선배가 다가가 한 마디 던졌다. “얘는 내 동생인데, 앞으로 얘 건드리면 너 죽을 줄 알아!” 이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은 평정이 됐고, 그날 이후로 등굣길에 나를 괴롭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내 뒤에 든든한 힘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새 힘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내 힘이 되어주시는 것이다.

피 흘리면서까지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힘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처음 부임했을 때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아무개와 손을 잡으면 목회가 편해집니다.” 하지만 그와 손을 잡은 적은 없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손을 잡고, 그도 하나님의 손을 잡으면 우리가 서로 손을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사람의 손을 잡으면 그만큼 쉬워지겠지만, 또한 그만큼 올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원칙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가끔은 가슴에서 피가 흐를 때가 있다. 그때마다 이 말씀이 생각이 난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12:4)

우리가 피 흘리면서까지 이 길을 가야 하는 이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든든한 힘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좁은 길은 그만큼 불편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 길이 영광의 길이기에 오늘도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지금도 목회 현장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피 흘리는 동역자들에게,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피를 흘리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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