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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만족도 목사 3위가 불편한 이유

계인철 목사 / 광천중앙교회

목사 3. 전도사 78. 우리나라의 621개 직업을 대상으로 한국고용정보원이 조사해 발표한 직업 만족도에서 목사가 3위에 올랐다. 발전가능성, 급여만족도, 직업 지속성, 근무조건, 사회적 평판, 수행직무만족도라는 평가 항목 중 급여 만족도와 근무조건에서만 좋지 않은 점수를 받은데 반해 발전가능성과 직업지속성 그리고 사회적 평판과 수행직무만족도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목사가 판사, 도선사에 이어 3위에 랭크된 것이다.

90년 대 이전만 해도 남편 선호도에서 순경, 이발사 다음이었던 것이 90년 대 이후 선두권인 교수, 치과 의사 다음으로 진입하더니 이제는 직업 만족도에서 3위에 오르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코 좋아할 것만은 아니다. 또한 평가 항목은 목사의 정체성을 세속화시킨 것 같아 조금은 불편하고 불쾌하다.


목사는 조건충족에 따라 갖게 되는 직업이 아닌, 하나님의 소명하심에 의해서만 세움 받는 성직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의 종이다. 그러기에 자본주의, 즉 배금숭배 세상에서는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급여만족도와 근무조건이 나쁜 것이 도리어 더 우리다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세상적 평가기준에 의한 3위라는 등수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 우리의 올바른 정체성을 회복하는 자아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함이 옳을 듯하다.


목회는 발전 가능성이나 늦은 정년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만족 여부와 상관없이 소명하신 이에게 오직 충성하는 것이다. 오직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좋은 사회적 평판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해 꼭 좋아야 할 필요는 없다. 비록 부름 받아 사역하는 곳이 열악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아골 골짜기 빈들일지라도 소명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따라 가는 길이기에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이 목회다. 목회는 세상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지 상관하지 않고 이름도 빛도 없이 허락하시는 그 날까지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목회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의로운 복음이 저항과 미움을 받는 것은 주님도 말씀하셨기에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부 목사들은 세상과 동거를 시작했다. 비록 소수이지만 물질화, 세속화되고 있다. 심령의 진정한 부흥이 아닌 바벨탑 같은 외적 성장에 집착하며 세상을 닮는다. 자연석과 인공이 맞닿은 부분을 처리하는 수법인 그랭이질처럼 복음을 깎아 세상에 잘 맞게 다듬어 세상에 잘 올려놓는다. 이렇게 세상의 한 구성원이 되어가는 사이 목사는 갈매기가 날아드는 것을 자신에게 키스한다고 흥분한 바다같이 됐다. 사실 자기 물고기를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아라 노렌자얀(Ara Norenzayan)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에서 산업혁명 이후 신의 도움 없어도 된다고 말한 것처럼 세상적 가치에 물든 일부 목사들로 인해 이제 세상은 하나님을 더 이상 필요한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됐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에서 밝힌 특이점’, 즉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며 십자가를 지고 가던 목회자의 세속화율이 특이점을 넘어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목회자는 칼융의 인간은 천 개의 가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페르소나’(persona), 즉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다양한 가면을 가지고 타자에 의하여 변하고 변질되며 변형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이제 양심의 부끄러움이나 죄의식도 없이 차별금지라는 이름으로 각종 비성경적인 법들을 노골적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본질을 흐리며 정신을 약화시키며 세상을 닮는 사이 세상은 더 이상의 두려움 없이 죄를 양심의 가책이나 의식없이 지으려 한다. 도리어 그것을 책망하는 교회와 목사를 비난하며 그들이 만들려는 법으로 포박하려 한다.


신경증 환자를 아들러는 나쁜 감정으로, 프로이드는 아픈 사람으로 보듯이, 생각하기에 따라 서로 다른 견해의 차이일 뿐 아니냐고 우리를 설득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대로 주저앉아 자멸의 길을 갈수는 없다. 틀린 것은 틀린 것임을 분명히 하며 이제라도 분연히 일어서야 한다. 그저 다를 뿐이야라고 속이는 거짓음성을 향해 진리로 소리쳐야 한다. 침례요한처럼 광야로 돌아가야 하고, 한 소녀의 춤 값으로 목이 수반위에 오르는 한이 있더라도 타락해 부도덕한 세상을 향해 적어도 목사는 진리를 외쳐야 한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거짓선지자들이 의로운 척 해 대더라도 예레미야처럼 맞아 죽을 각오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야 한다.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 변절한 요아스 왕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책망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제사장처럼 성전에서 돌에 맞아 죽을지라도 헤아릴 수 없는 목회적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외쳐야 한다. 아합을 책망했던 엘리야처럼 우상과 불의에 맞서야 한다.


선지자(Prophet)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세상을 향해 어떤 위협과 불이익 앞에서도 당당하게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일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환상(Vision)을 보는 선견자로 이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비전을 선포해야 한다. 오늘의 교회와 목사는 이 시대의 선지자요 선견자 아닌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던 주님은 지금 무엇 때문에 우실까? 죄악으로 넘치는 세상 때문에 우실까? 아니면! 목사는 세상이 아닌 주님이 인정하시면, 주님이 주신 사명 감당하다 주 앞에 서는 것이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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