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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학창 시절 어느 주일에 담임 목사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설교를 하시던 중 이렇게 해보라고 말씀하셨다. “눈을 감고 아버지! 하고 조용히 불러보세요 어떤 느낌이 들어요?”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방법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 나는 속으로 무척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육신의 아버지상이 내 마음에 확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때는 아직 예수 믿기 전이셨는데 내게 떠오른 아버지상은 술 취해 주정하는 모습, 아픈 내게 폭언을 퍼붓는 모습,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밥상을 집어 던지던 모습 등이었던 것이다. 인자하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를 떠올려야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것을 방해했던 것이다.


훗날 신학교에 입학해 목회의 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해결하는 것은 내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원수도 사랑해야 할 판에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분노의 감정을 지닌 채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서 전혀 합당치 않을진대 하물며 어떻게 목회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혼자 괴로워하며 울며 기도하기도 많이 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신학교 1학년을 마칠 때쯤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여 1년쯤 뒤에는 예수님을 영접하셨고 믿음도 계속 성장해가셨다.


그 무렵 성령의 은혜로 내 안에서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김정이 사라졌고 더 이상 나를 하나님 앞에 쳐 복종시키기 위한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대부분의 아버지들처럼 자식들에게 무뚝뚝하고 사랑 표현할 줄 모르고 칭찬할 줄 모르던 아버지(내가 막내였지만 다섯 살 이후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안아주거나 하신 기억이 없다)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마찬가지였고 돌아가실 때 까지 변함이 없으셨다. 평생을 그렇게 사셨기에 마음이 있어도 표현하는 것이 쑥스럽고 어색했던 것 같기도 했다. 왜냐하면 막내며느리에게는 외출했다 돌아오면서 먹을 것을 사다준다든지 하는, 당신이 자식들에게는 하신 적이 없는 행동을 하시곤 했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막내아들인 나도 아버지에게 애교를 부린다든가 사랑을 표현하는 어떤 짓도 한 기억이 없다.(내가 아버지께 해드린 것은 어릴 적 아버지의 요구로 다리를 밟아드리곤 한 것이 전부다) 내 나이 서른다섯에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오년 후 돌아가셨는데 그때 까지 내 기억에 남을 만한 친근한 감정표현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 당시에는 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었다. 부정적 감정이 없이 아버지를 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더 세월이 지난 후에야 내가 그렇게 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든 신학생 시절 내게는 나의 육신의 아버지 상에 방해받지 않고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 아버지 상을 온전히 깨닫고 경험하는 것이 정말 중요했다. 그러했기에 나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더욱 집중하게 됐고 그것은 나의 습관에까지 영향을 미쳐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아버지!”였다. 마음을 담아 간절하게 부르려 하다 보니 때로는 탄식처럼 느껴지기도 했는지 장난꾸러기 고등부 제자들이 흉내 내기도 했다.


그 때 내가 가장 집중해 묵상했던 성경은 누가복음 15장의 기다리는 아버지비유였다. 그 말씀에서 첫 번째로 내게 다가온 아버지상은 어찌 보면 무례하고 무모다고 할 수 있는 둘째 아들의 유산분배 요구를 들어주는 아버지 즉 아들을 인정해주고 강요하지 않는 아버지상이었다.

사실 우리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식의 미숙함을 빌미로 부모의 뜻을 강요하고 자식의 주관을 인정하지 않는지 대학입시 풍경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 성인이 된 자식들에게 까지 그렇게 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의 연약함을 나보다 더 잘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대해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뿌듯한지 모른다.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은 오직 자유로움 속에서 이루어질 때 진정 의미 있는 것이기에 기다림의 아픔을 감내하시기 까지 하시면서 아들의 뜻을 인정해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두 번째로 다가온 아버지상은 아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품고 기다리는 아버지상이다. 아들이 자초한 고통이고 그것이 또 아들의 성장에 꼭 필요한 연단의 과정이 될 수 있을지라도 안타까워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내가 무슨 잘못을 하더라도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언제나 기다리고 계시는 든든하고도 고마운 아버지의 모습이다.


세 번째로 다가온 아버지상은 내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아버지상으로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상이다. 용서와 용납과 환영하는 아버지, 그것을 몸으로 격렬하게 표현하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온 몸으로 온 삶으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격렬한 것임을 보여준다.


나의 육신의 아버지로부터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고 어머니로부터 조금 경험한 것이기에 이 아버지의 상은 쉽게 각인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하게도 성령님께서는 내가 온 몸으로 경험한 것처럼 느낄 수 있게 역사해주셔서 그 어떤 하나님 경험보다 강하고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해주셨다. 할렐루야!

내 딸들에게 나는 어떤 아버지일까? 하나님 아버지를 이해하고 경험하는데 내가 도움이 됐을까? 방해가 됐을까? 어디 한 번 물어볼까나?

고성우 목사 / 반조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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