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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인가 주님인가

- 주재권 구원은 성경적인가? -

구원이 무엇인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들(sins)의 사면을 받는 것이다. 어떻게 구원 받는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구원 받는다(행26:17~18).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게 무슨 말인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시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이다(행20:21).

구원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이단들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도 제국도 외부보다 내부가 부패할 때 무너졌다. 죄 사함의 기쁨을 왜곡시키는 박옥수, 4 단계 회개를 주장하는 박무수, 자기가 보혜사 성령이라는 신천지 교주 이만희 등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이단들이 있지만, 교회 밖의 이단보다 더 무서운 게 교회 안의 이단이다. 교회 속의 누룩이다.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구세주(Savior)와 주님(Lord)으로 영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의 배후에는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가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가르침에 사람이 무엇을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예수님을 자기 삶의 주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대표적인 목사가 존 맥아더(John MacAuthur)이다. 최근에 그의 책,‘The Gospel According to Jesus’가‘주님 없는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번역이 됐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가끔 좋은 동기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본다. 이들은 수준 이하의 기독교와 수준 낮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진저리가 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님 자녀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실망을 느끼고 애통하다가 그 애통을 교리로 만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경적인 구원 교리에 행위를 첨가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들은 “만약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 아니시라면 그 분은 전혀 주인이 못 된다.라는 식의 영적인 문구를 사용한다. 이들은 또 이런 말도 한다. “쉬운 믿음으로 받는 구원(easy believism)은 값싼 구원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낮은 수준에 대한 실망이나 혐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단적인 가르침을 수용하게 한다. 사람들은 신약적인 기독교로 돌아가자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사실 신약시대 이후로 사람이 변한 것은 없다. 그때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수준 낮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의 모든 삶의 주인은 아니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이들이라 불리었다(고전3:1~4). 또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은 그 육신은 멸하고 심판 날에 그의 영이 구원을 얻게 하리라 하셨다(고전5:1~5). 그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또는 다른 어떤 사람들처럼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체 삶의 주인이 못되셨던 것이 분명하다. 또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자들의 삶에서 다시 한 번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을 본다(갈4:8~11).


롯이 소돔에 있었을 때 예수께서 그의 주인이셨는가? 그럴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인”이라 하셨다. 이 말은 롯이 행위에서 의로웠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믿는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웠다는 뜻이다. 다윗이 범죄 했을 때 예수께서 그의 주인이셨는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믿음을 부인했을 때에도 예수께서 그의 주인이셨는가? 믿음이 부족하여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도망을 갔을 때에도 예수께서 그의 삶의 주인이셨는가? 모세가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침으로 거룩한 땅에 들어가는 티켓을 잃었을 때에도 예수께서 그의 삶의 주인이셨는가? 야곱이 하란에 있던 그 모든 기간에도 예수께서 그의 삶의 주님이셨는가?


주재권 구원은 행위구원이다.
물론 성경에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주재권”(The Lordship of Christ)에 관한 가르침이 있다. 그리고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재권(주님 주권)에 양도되어지기를 원하는 경고와 당부와 권면의 말씀들로 가득 차 있다.“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2~13)


그러나 이 말씀들이 주재권 구원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주는 권면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신 사람에게 주는 권면이 그 분을 주님으로 모시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주재권에 의한 구원(Lordship Salvation)은 행위에 의한 구원이며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만약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셔서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될 것이다. 구원을 받을 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셔서 자기의 삶을 온전히 양도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아기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기들이 있다는 것이다(고전3:1,벧2:2). 주재권에 의한 구원(Lordship salvation)은 필연적으로 구원을 잃는다는 가르침을 가져오게 한다.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를 자기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면 그가 예수께서 더 이상 주인일 수 없는 위치로 타락할 때 그는 더 이상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부인했을 때의 베드로나, 바울과 다투었을 때의 바나바 또는 하나님의 뜻을 떠나버렸을 때의 요나와 같은 이들의 구원을 의심케 만든다. 진짜 구원을 받았다면 그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구원 받은 후에 죄를 지었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주재권에 의한 구원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부인하게 된다. 우리는 아무도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가르친다(고전2:14). 세상은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들로 나뉜다. 구원받은 자 중에는 육신적인 자와 영적인 자가 있다. 육신적인 자들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기쁘지 않다. 그렇지만 그런 자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주재권에 의한 구원은 은혜를 제거시킨다.
나아가서 주재권에 의한 구원은 은혜를 제거시키며 구원에 대한 명백한 말씀들을 무용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1~12)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이 모든 말씀들은 구원이 믿음으로, 다시 말하면 갈보리에서 다 이루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음으로 받는다고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구원은 받는 것이지 주는 것이 아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구원을 받을 때 주는 이는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단지 받는 일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주셨다(요3:16).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요10:28).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신다(롬8:32). 우리가 믿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받게 된다. 주는 자가 되려면 제자가 돼야 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제자의 삶은 나의 희생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초로 하지만 제자의 삶은 나의 성실함에 달려 있다. 그래서 구원은 잃지 않는다. 하지만 제자의 삶은 잃을 수 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의 마음을 예수께 드려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진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들로 인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자기의 마음을 주님께 드려서가 아니고 예수님과 그의 선물인 영생을 마음에 받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주재권은 구원을 거래로 만든다.
또 주재권에 의한 구원은 구원을 하나의 거래나 교환 심지어는 뇌물이 되게 한다. 그것은 영생을 위해 단순히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제거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는 것으로 만든다. 하나님께서“네가 내가 무엇을 주면 나도 네게 무엇을 주겠다. 우리가 거래를 하자. 그러면 네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이 된다. 구원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고 나는 그것을 받는 것이다(롬6:23).


그리스도의 주재권(Lordship of Christ)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을 생각해 보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육 안에(in the flesh) 있으며 죄는 그 사람 안에(in him) 들어온다.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in him) 들어오신다(골1:27). 그리스도가 들어오실 때에 옛 사람은 떠나지를 않는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실지라도 여전히 옛 성품은 그냥 남아 있다(롬7:15~23). 새 사람에게는 새 환경이 필요하다. 그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5;17) “그리스도 안에서”나 또 그와 같은 말이 신약성경에 130번 이상 언급되고 있다.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유용하게 되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엡1:3) 이런 것들이 내게 유용하고 나의 삶이 그것들과 함께 한다 해도 그것들은 나를 강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의 의미
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이런 것들이 내게 유용하지만, 내가 선택해야 내 것이 된다. 그런 것의 하나가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엡2:13).
다른 하나는 영적 행함이다(요일2:6).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인정함이다(롬16:10). 또 영적 성장이 있다(골2:7). 그리고 영적 성숙이 있다(골1:28). 다른 하나는 성화(聖化)이다(고전1:2). 이 모든 것들이 믿는 자들에게 유용하게 됐다. 모든 것이 자기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기까지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이런 것들과 또 다른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것들을 얼마나 누리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며 또 그 정도만큼만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어린 그리스도인은 마치 가정에서 어린 아기가 세탁기나 자동차 같은 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중의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것들을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는 은혜 안에서 자라며 예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그만큼 더욱 주인이 되시는 것이다. 이 땅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아마 사도 바울일 것이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고 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원치 않는 것을 한다고 탄식했다. 그 누구보다도 주님은 사도 바울의 삶의 주인이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은 자신이 아직 이룬 것이 아니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주재권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 속에 담긴 허구와 교만을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은“내가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모셨다.”고 말한다. 그 말은 예수께서 그의 삶을 주장하고 계시며 그는 온전히 그분께 드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말을 진정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반면에 이같이 말하는 사람의 겸손을 보라.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다.” 이 사람이 말하는 구원은 자기에게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영접하는 것 외에는 그것을 받기 위해 한 일이 없다. 그것은 선물이었다. 반면에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 그 대가로 그것을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거래를 한 것이 되며 그런 구원은 우리가 번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행위 구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은 명백히 이단적인 사상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사람의 주장을 믿어야 하는가?


김현일 목사 /사랑진교회 담임
의료법인 한세의료재단 대표이사
미국 GPBS 교육학박사(Ed.D.)
에베소말씀사역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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