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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 약속

나의 생애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주님의 말씀은 창세기 15장의 언약(covenant, 뻬리트)와 야고보서 112절에서 말씀하신 약속하신 약속(God has promised, 에펭게일라토)이라는 말씀이다.

그 해 장마는 왜 그렇게 길고 오래 많은 비가 왔는지? 지금 추억해 보면 시인 김소월의 시 왕십리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열한 살 어린 소년이었던 나는 낮선 마을 고모네 집에서 장맛비가 그칠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기다려야만 했다. 비 그치기를 기다린 날이 아마 네 닷세는 족히 됐는데도 그 장맛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비 그치기를 기다리던 아버지께서 단호한 목소리로 일아 오늘이 약속 된 날이라서 가야해그래서 슬그머니 창밖을 내다보니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 비 그치고 가면 안 될까요?” 그러자 아버지는 일아 오늘 수요일 저녁 설교하기로 약속 된 날이란다. 가야지하신다. 비닐 우비를 입고 허리를 동이고 단봇짐을 지고 장대같이 내리는 빗길을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오랜 장맛비로 계곡물은 불어나 다리라는 다리는 계곡의 범람으로 다 휩쓸려 떠내려가고 찻길에는 언제 차가 다녔는지 바퀴자국이 다 쓸려 내려가고 움푹 패였던 자국은 퉁퉁 불어 물이 고여 있다. 아무리 뒤돌아봐도 운행하는 차는 한 대도 없고 가는 곳마다 다리란 다리는 모두 휩쓸려 떠내려 가버렸고 계곡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산 계곡 물은 마치 성난 파도보다 더 거칠게 넘실대며 마치 너희 부자가 건너려면 한번 건너봐 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길을 버리고 길도 없는 산등성을 넘고 또 넘고 말없이 아버지 뒤만 따라 수 십리를 따라가다 보니 빗길에 발은 불을 대로 불어 발에 신발이 턱없이 작아져서 발은 아파오고 초라한 우비로 가린 옷은 젖을 대로 젖어 여름 장마인데도 한기가 온몸을 휘감는데 졸음은 왜 그렇게 쏟아 붓는지. 그래서 다시 한 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버지 꼭 오늘 가야만 하나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정일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건널 길을 예비해 두셨을 거야, 예배는 하나님과 약속이란다.”그러시면서 묵묵히 앞장서 가신다.


천근만근이 된 다리를 이끌고 산등성이를 또 하나 넘는데 저 계곡 아래 마침 떠내려가지 않은 외나무다리가 그 거친 계곡 물살을 온몸으로 버티며 비틀거리며 서있었다. 겨우 생소나무가지를 베어다 늘어놓고 그 위에다 뗏 잔디를 파다가 엎어 놓은 다리가 꿈틀거리면서 기적같이 떠내려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어린 내 눈에는 저 다리를 건너는 것은 곧 죽음과 같은 공포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우리 하나님께서 예비하셨구나! 일아 기도하자 하시면서 하나님, 이 다리를 예비해 주셔서 감사하며 우리 부자 안전하게 건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며 오늘 약속된 예배에 늦지 않도록 인도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신 후 아버지께서 먼저 포복하는 자세로 엎드려서 건너기 시작하셨다. 나 또한 아버지께서 건너시는 방법으로 엎드려 건너기 시작했다.


눈 아래에는 성난 물결이 나를 삼킬 듯이 포효하며 흘러가고 있다.

마침내 아버지께서 맞은편에 먼저 건너시고 허리춤쯤 흐르는 물살을 거슬러 내손을 잡고 부자가 맞은 편 땅을 막 밟는 바로 그 순간 언제 그 자리에 외나무다리가 있었느냐는 듯이 철퍽하고는 외나무다리가 우리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긴장이 풀어지자 배고픔과 함께 온 몸은 한기로 이빨이 딱딱 마구 마주치며 온 몸을 휘감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돼서도 비오는 날을 매우 싫어한다. 그래도 우리 부자는 약속된 그 시간에 예배하며 설교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천신만고 끝에 예배 전에 우리 부자는 도착할 수 있었고 아버지는 부임지에서 약속한 첫 예배를 인도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분의 아들인 나는 ! 약속은 이런 상황에서도 지켜야 하는 것이로구나!’ 내가 자라면서 어른이 되어서도 약속하면 7년 전에 먼저 주님의 품으로 가진 선친이 생각나며 36년을 목회하면서 약속을 할 때마다 그 여름의 장맛비가 생각난다.

그리고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는 오늘날의 교계와 또 적지 않은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어린 소년의 날 넘실대던 계곡물에 사라져 버린 외나무다리를 생각한다. 모든 기록은 깨기 위해 있는 것이지만 약속은 지키기 위해 있는 것임에도 오늘 우리 목회현장과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면 약속도 깨기 위해 하는 것 같은 민망함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 자비 구원의 은혜 정말 귀한 말씀이 많지만 그분이 언약, 약속을 지키시지 않으셨다면 그 모든 주님의 은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36년의 목회 가운데서 약속이 헌신짝 같이 버려지는 차마 못 볼꼴들을 참 많이도 보아왔다.

박완서 선생에게 선생님께서 다시 젊어지신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나는 결코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내가 젊어져서 다시 그 꼬라지들을 보라는 말이냐?”라고 했다는 말이 기억난다. 나 또한 그렇다 지금의 내가 좋다. 자기 이권을 따라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우리들의 현실을 바라보며. 해아 언덕에서


이정일 목사 / 청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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