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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힘

형의 분노로부터 도망치듯 야반도주한 야곱이 그 밤에 도착한 곳은 루스였다. 언제 누군가로부터 약탈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처지였다. 숨을 곳도 밤이슬을 피할 곳도 없어 그저 너른 들판에 자리를 깔았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침대였고, 가장 높은 천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네 조부 아브라함과 네 부친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하고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 놀랐다. 아버지의 집에만 계시는 줄 알았던 하나님이 여기에도 계셨던 것이다. 그 하나님이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나와 함께 하시겠다니. 그래서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곳 벧엘은 야곱의 생애에 영적인 고향이 됐다.


힘들 때마다, 흔들릴 때마다, 그때 그곳에서 들려주신 주의 음성,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지키리라는 이 음성이 그에게 큰 힘이 됐다. 어쩌면 야곱은 그 추억 하나로 일생을 버텼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영적인 추억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고향 뒷동산을 떠올리듯이, 영적인 고통이 밀려올 때면 문득 찾고 싶은 곳이, 그리고 떠올리는 추억 하나가 있다. 어떨 때는 그런 추억 하나면 충분할 때도 있다.

몇 년 전, 해마다 여름이면 미자립교회 목회자 열 가정을 초청해서 위로 사역을 했었다. 지금은 예산 문제로 중단된 상태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힘겹게 사역의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며 사역하다 탈진한 사역자들이 힘을 얻고 새 출발 하는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다. 타이틀은 목회자 수양회지만 강의 한 시간 없이, 잠시 모여 소개하고 기도한 후 시작되는 23일간의 일정은 잘 먹고 잘 노는 것이 전부였다.


부산이 휴양관광 도시다 보니 휴양하며 관광하는 데는 이만한 곳도 없지 싶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쉼의 시간을 통해서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한다. 그냥 고마워서가 아니다. 힘겨운 사역의 현장에서 얻은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벧엘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말은 못 하지만 아마도 여러 번 도망치고 싶었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시간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다시 힘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추억의 힘이다.

그 돈을 송금해 주면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도 개척교회를 해봐서 안다. 어차피 그 돈은 밑 빠진 독에 붓는 물과 같다는 것을. 줘도 자신을 위해서는 쓰지도 못한 채 또다시 교인들을 위해 내놓을 거라는 것을. 주고 또 주어도 더 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여전히 죄인의 마음을 가지고 고개를 숙이고 살아가는 사모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다. 돈이 아니라 추억을 선물하자고.


그런데 예산 때문에 중단한 지 몇 년이 흘렀는데, 며칠 전에는 생뚱맞게 그 생각이 떠올랐다. 다시 시작해야 할 사역이라는 부담이 커졌다. 하지만 예산 때문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가슴 속에 한 가족이라도 먼저 시작하면 되지 않겠니?’라고 속삭인다. 그리고는 우리 교회에서 사역하다 개척을 떠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왜 그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에 부담을 가지고 있는데 마침 설교 본문이 위로받았으니 이제는 위로하자는 적용이었다. 그래서 이 마음을 털어놓았는데, 그 주간에 한 남정네가 목양실 문을 노크한다. 그러면서 설교를 듣는데 자기가 했으면 하는 부담이 들더란다. 사실 그는 몇 년째 무직 상태였다. 그래서 마음은 있는데 능력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몇 년 전 그만둔 회사에서 못 받은 임금이 입금된 것이다. 그렇게 받아내려 해도 안 되던 것이 너무 쉽게 입금이 된 것이다. 그때 그는 무릎을 쳤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감동시키셨구나.’ 그리고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목양실로 뛰어온 것이다.


사실 이런 경우라면 자기 쓸 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고 고백하기 일쑤인데, 이 집사님 마음도 참 곱지. 이 사역을 위해 임금이 지급된 거라면서 흔쾌히 내놓는다. 자기 쓸 것도 모자랄 텐데 말이다. 눈물겹다. 그래서 그랬다. ‘그 마음 너무 고맙다. 하지만 반 만 하자. 나머지는 내가 어찌해 볼게.’ 아니란다. 이왕 하는 거 자기가 다 하고 싶단다. 모자라면 더 내놓겠단다. 돈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은 사람인데, 하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감동시켜도 꼭 사르밧 과부 같은 사람만 감동시키는지 모르겠다.

그분 때문에 한 가정을 초청할 수 있었다. 그래서 초청 대상자에게 전화를 걸어 한 번 내려오라고, 날을 잡으라고 했더니 얼마 후에 전화가 왔다. 너무 감사하다고, 가장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목사님을 통해 위로해 주신다고 감사하단다.


사모는 그 말을 듣고는 엉엉 울었단다. 사방에 튼튼한 콘크리트 벽이 둘러쳐 있고, 거기 갇혀 옴짝달싹도 못 하는 마음이었는데, 어느 한 벽이 쿵하고 무너지며 사방이 보이는 형국이었단다.

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이런 마음을 주셨는지, 그리고 왜 그 사람이 머리에 떠올랐는지, 그리고 왜 하필이면 그 가난한 남정네가 감동을 받아 봉투를 쾌척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하나 더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돈이 아닌 성도의 마음을 주고 싶었다. 아니, 그걸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싶었다. 그 옛날 벧엘에서 야곱이 들었던 그 음성을. 수요 저녁 설교를 부탁했고, 그가 설교를 마친 후 나는 단 위에 올라가 교인들에게 말했다.


어쩌면 가장 힘든 순간을 지나고 있을 겁니다. 이들에게는 돈보다 더 큰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격려의 박수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른 박수를 치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감동되시는 대로 지갑을 열어 나가시면서 헌금바구니에 넣어 주십시오. 얼마인지 세지도 않고 전해 주겠습니다. 이것은 돈이 아니라 여러분의 격려의 박수입니다. 없으신 분들은 맨주먹을 넣었다 빼주셨으면 한다.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입니다.”라고 얼마인지는 세지도 않았지만, 그것이 큰 힘이 되었을 거다.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사람을 불러서 여러 모양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놀라울 뿐이다. 부디 이 힘겨운 시간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벧엘의 추억이 되었기를. 동이 터올 때까지 버티는 힘이 되었기를.


범준 목사 / 영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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