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병원을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합니까?” 앞에 앉은 자매가 “남산동에 내려야지요. 나도 거기 내리니 따라 내리면 돼요” 옆에 앉은 분이“거기는 뭘라꼬 가요. 침례병원 문닫은지 오래됐어요.” 앞에 앉은 분은 “그래요! 아이고 우짜노, 나는 오랫동안 침례병원만 다녔는데…그게 정말입니까?” 이렇게 병원에 대한 얘기가 오가다가 날보고 “문 닫은 줄 알고나 갑니까?”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한 후 나도 하도 답답해서 7월 3일부터 한 주간 금식기도를 하려했는데 집 이사를 하느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기도라도 하려고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대답했다.
정문 앞에 두 사람의 수위가 지키고 있어 서울서 여기 온 사실을 얘기하고 잠깐 기도하게 허락해 달라했더니 법적 관리중이라며 딱 거절해서 눈치를 보다가 지하로 들어가는 문으로 달려가니 주먹만 한 열쇠가 굳게 챙겨져있어 또 다시 나와 할 수 없이 정문에서 사진을 두 장 찍고 고개 숙여 기도한 후 눈물을 닦으며 돌아 나와 전철로 온천장에 내려 모텔에 투숙하고 부산의 어느 누구와도 연락 않고 습설해서 노포동에서 버스로 목포와 광주를 거쳐 무등산 기슭 모텔에서 늦잠 자고 이튿날 기차로 서울로 올라오면서 뒤돌아보니 ‘침례병원은 나 때문에 문 닫았구나’하는 생각에 회개의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6)
1954년 2월 고등학교에 입학하려고 부친의 동의 없이 무턱대고 울릉도에서 댕구리선 배를 타고 28시간 휴전선을 드나들며 풍파에 시달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포항 학산 부두에 내릴 때는 10여명 선객의 몰골은 귀신딱지였다.
휴전 이듬해의 포항은 산만해서 포항서 고등학교 입학을 접고 경주로 가서 수요일 저녁 침례교회를 찾아 예배하며 노인 허담 목사의 설교를 듣고 부산으로 가라해서 내려가 고향서 부친이 말씀하신대로 전철을 타고 남포동에 있는 침례병원을 찾아 2층에 올라가서 미국 선교사의 진료를 잠깐 보고 용두산에 오르니 전부 피난민의 게딱지 천막과 오두막의 아우성이 진동해 경남고등학교를 포기하고 대구로 올라와 경북고등학교보다 기독교학교인 개성고등학교에 떨어져 주덕건 장로가 하는 영남고등학교에 입학해 졸업했다.
첫 번째 회개는 1983년 총회장에 당선되어 기관 순방 중에 침례병원에 들러 우기수(Wiggs) 원장과 깊은 대화중에 미남침례회 해외선교부(IMB)의 장기전략은 현지인에게 점차적으로 운영권을 넘기려는 계획이라 했다.
이미 대천휴양소나 인천 숭의동 3000평 땅 매각을 알고 있던 나는 한국인에게 넘기면 무주공산 곧 자기의 투자나 정성이 안든 주인 없는 사업이라 어찌될지 모른다는 것을 보았기에 침례병원만은 한국인에게 넘기지 말고 선교사들이 더 오래 운영권을 갖고 섬겨달라는 부탁을 못한 나의 잘못이었다.
이듬해 미국 방문시 리치몬드(Richmond)의 IMB본부에서 피칵 선교사를 포함한 회장이하 6인과 하루 저녁 대담 중에 진언하지 못한 죄를 지금 와서 다시 뉘우쳤다.
둘째로, 침례병원을 남산동으로 옮기려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내려가 코모도호텔에 투숙하고 당시 김성진 원장에게 옮기지 말 것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권유했으나 이미 진행 중인 것을 파악하고 더 이상 변화 없이 진행됐다. 병원이 잘 될 때에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은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지만 호황에 자중하지 못하면 위험을 맞는다고 했다.
초량동 위치가 부산의 중심이고, 병상이 모자라는 것은 증축이 안 되면 옆 건물을 사서 지하 몇 층에 주차장을 하고 3층을 지어 병상을 넓히고 돈 되는대로 10층까지라도 증축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셋째로, 우기수 원장에게 병원의 실무자인 간호사를 위한 침례교 정신을 가진 간호학교를 영도 선교사 부지에 세울 것을 제안한 바 있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그 후 침신대 10여년 이사 및 이사장으로 봉사하면서 비전을 가진 허긴 총장과 침례병원에 대하여 신학교에 부속여부 기타를 의논한 바 있었다.
넷째로, 다른 기관 이사는 안 해도 병원 이사 또는 이사장을 역임했더라면 달라졌으리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2015년 8월 7일 침례병원이 어렵다해서 제일 먼저 100만원을 만들어 내려가 설교하고 살리는 일에 동역자들을 여럿 만났는데 병원 원장실에서 34명의 이사장의 사진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해 원장은 총회에서 870억 부채를 시인했고 이미 기울어지는 형편이었다.
다섯째로, 그 후 병원을 살리기 위해 여러 번 부산으로 들락날락했는데 마침 서울 연희동 선교부 부지 매각이 생각나서 병원의 미국인 이사 옛 친구 손철수(Charles Sands) 선교사가 내한해 만나 의논한 후 병원 측으로 우리 셋은 연희동을 찾아갔다. 동아시아 담담 선교사 스타링스(Starling)는 나를 자꾸 사회자로 앉으라고 해서 우리 6인은 회의를 진행했다.
나의 제안은 매각대금의 50억은 미남침례회 해외선교부로 보내고 나머지는 병원 살리는데 쓰고 한국 선교부는 침례병원 6층에 이사하고 한국선교사 안식관도 해외선교회와 협의해 선교사들 진료도 하는 6층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안했으나 손 선교사는 300억 매각 대금 사용의 초점이 북한 선교에 있었다. 새로 선임된 해외선교부 총재가 같은 주 이웃 동리 사람이라 잘 되리라고 했으나 귀국 후 3일 만에 매각은 부결됐다.
여섯 번째, 평생을 봉사하신 직전원장 이준상 의사 같은 사람이 10명만 있어 한해 수익을 3~400억 원을 올린다면, 침례병원을 회생시킬 수 있다는 말에 옛날 유치원 화상치료 때문에 미국의 남침례교 병원을 알아본 결과 그 당시 21개가 있는데 최희준 선교사의 고향인 겔베스톤(Galveseon)의 화상전문의 멕코리(Mechory) 박사, 놀만(Narmen)병원의 스튜워드(Steward) 박사 같은 의사에 유능한 전문의 두 사람 더 한국에 와서 봉사하도록 BWA를 통해 알게 된 옛 친구인 남침례교 증경총회장이요 현 서남신학교 총장인 페이지 페터슨(Page paterson), 증경총회장 모리스 체프만(Morris Chapman) 박사 등 10여명과 직전 해외선교회 총재 제리 렌킨(Jerry Rankin) 등을 만날 계획을 갖고 김장환 목사님과 의논한 바 있으나 여의치 못했다.
일곱 번째, 1954년 2월 처음 침례병원에 가본 이후 정말 진정으로 기도 못한 죄와 목회하면서 알바로 돈을 벌었더라면 수백억 원을 모았을 텐데 금전적으로 도울 수 없는 자신에게 자책을 하며 어떻게 세워진 병원인데 병원 당국의 경영진과 이사들과 강성노조와의 좋은 화합에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나의 우준함과 미약함을 개탄하면서 이제라도 총회는 회생운동을 전개했으니 우리 다 같이 잘못을 회개하며 재기의 결단과 회생의 도전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서울교회 유치원 화재로 만난 환란 날에 주셨던 많은 말씀 중에 로마서 8장 28절이 떠오른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한명국 목사 / BWA전 부총재, 예사랑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