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의 역사가 실감이 나지 않지만 예배와 말씀으로 꾸준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제 머지않은 100년을 향해 세종송담교회는 진실한 예배드림과 말씀을 살아내는 신실함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리라 믿고 감사드립니다.” 세종송담교회는 1931년 4월 2일, 연기군 남면 송담리 임근수 장로의 가정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오경환 목사가 주인을 전도하고 그집의 사랑방에서 예배드리면서 시작했다. 일제의 박해와 6.25 전쟁으로 예배당의 문이 닫히고, 전소되는 시련을 겪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예배드림은 멈추지 않았다. 비록 작은 시골교회였지만 초교파적으로 40여명의 목회자와 교단과 관계없이 지역으로 분리 개척해 지역사회에 영향력 있는 교회로 세워졌다. 92년의 세월이 흐른 세종송담교회는 종촌시대에서 조치원시대를 거쳐 세종시대를 맞이하며 하나님의 몸된 공동체를 이뤄가고 있다. 20여년을 교회의 사역자로 섬기는 가운데 교회의 격변기를 맞아 담임목회의 길을 걷는 임명성 목사(정지영 사모)는 가장 낮은 자리에 거하기 원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라기보다는 이웃집 형님 같은 포근함과 편안함을 겸비한 임 목사를 통해 세종송담교회의 과거와 현재
새로 조성되는 신도시의 특징은 명확하게 구획들이 나눠지며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을 구분짓고 있다. 또한 그 안에 종교부지도 들어서게 되는데 특히 주거지역에 위치한 종교부지에 교회를 건축하는 일은 흔치 않으며 쉽지 않다. 신도시는 복음 전도의 ‘황금어장’이라 할 수 있지만 교회의 문턱은 높은 것이 사실이다. 보상을 받은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신도시의 종교부지로 오기를 희망하는 교회도 나름대로 여러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영종하늘도시에 종교부지를 매입해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한 세계로향하는교회(박재근 목사)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예배당을 마련하고 새로운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교회 개척 피눈물 속 부흥 이루다 1990년 12월 3일 서울 대림동 상가 지하에 교회를 개척한 박재근 목사는 교회를 세우면 모든 것이 다 이뤄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누가 지하 개척교회를 방문하는 이는 없었다. 사택도 없이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매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밥을 굶기도 수없이 많았지만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더 힘써 기도하기 시작했다. 박재근 목사는 “지하 개척교회를 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 구경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매일 복음을
목회자는 종종 갈등과 아픔이 있는 교회로 부임하는 경우가 있다. 부임의 과정이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겪는 성장통과 같은 일들이다. 2001년 2월 공도중앙교회 담임으로 부임한 최인수 목사도 교회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새로운 비전을 품고 교회에 부임했다. 최 목사는 “1996년에 교회를 개척해 나름 성도들도 모이고 즐겁게 목회하다가 공도중앙교회 부임을 제안받았을 때, 새로운 목회의 도전이라 생각하고 교회의 상황도 살펴보지 못하고 수락했다”며 “부임하는 날, 교회의 현실은 너무나 열악해 기도만이 제가 사는 길이고 교회가 사는 길이었다”고 회고했다. 1971년 세워져 7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최인수 목사는 부임 초기부터 현실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교회 이미지 쇄신에 나서기 시작했다. 변화 위한 성전 건축 ‘고난의 시작’ 최인수 목사는 과거의 모습을 잊기 위해 교회명도 공도중앙교회로 변경하고 새로운 비전을 세우며 예배당 건축을 진행하기로 했다. 재정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건축을 시작했지만 터 파기 공사를 끝으로 교회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공사도 2차례나 중단되면서 무모한 도전은 아닌지 성도들에게 큰 상처를 주
“경기중앙교회가 품은 비전은 건강한 교회, 건강한 목회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면서 제가 역점을 둔 것은 바로 건강한 성도와 가정, 교회였습니다. 온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강력한 십자가의 군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끊임없이 훈련하고 가르치며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온 성도들이 강력한 하나님의 군사로 세워지게 되었으며 담임목사의 목회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십자가의 군사가 되었습니다.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도와 기도로 무장된 건강하고 튼튼한 믿음의 교회가 바로 경기중앙교회입니다.” 경기도 평택시 서정역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경기중앙교회(안도엽 목사). 전철역과 인근 재래시장, 농협 하나로마트, 초등학교와 아파트단지까지 교회 주변의 다양한 인프라는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교회를 찾게 된다. 경기중앙교회 또한 지역사회를 위한 헌신과 봉사, 전도의 동력은 식을 줄 모르고 복음의 열정으로 지역 복음화에 힘쓰고 있다. 이 모든 에너지는 바로 안도엽 목사의 특별한 목회관에서 시작됐다. 강력한 부르심…시련과 역경의 연속 안도엽 목사는 불신앙의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목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닐 때까지 집안의 도움을 일체 받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집을 지키는 개들만이 주변의 차량에 반응하며 짖어대는 마을에 태양광 지붕을 올린 교회가 있다. 교회 입구에 들어서면 교회 마당을 지키는 개들이 손님을 반겨주고 교회 외부 스피커에서는 찬양과 함께 방문자를 환영해준다. 어느 덧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나온 죽림교회 김일하 목사는 스마트폰 하나로 교회의 음향을 컨트롤하며 기자를 맞이했다. 김 목사는 “나와 아내가 거의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모든 시설을 스마트화 시킨 상태이다. 새벽예배 시간이 되면 알아서 교회 본당의 불이 켜지고 전기 난방기가 돌아간다. 이른 새벽 은은한 새벽공기에 맞춰 반주기의 찬양이 시간에 따라 흘러나온다. 대부분의 전기 제품이기 때문에 전기료가 걱정되지만 우리의 든든한 태양광 전기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교회 지붕도 사역을 위해 쓰여진다 죽림교회 지붕에는 태양광 패널들이 설치돼 있다. 태양광을 통해 전력을 생산하고 생산된 전력을 교회에서 사용하고 한국전력에 판매한다. 정부 보조를 받고 설치했지만 적잖은 비용이 들어간다. 김일하 목사도 울릉도 출신으로 경북 포항과 충남 서산에서 23년을 사역하고 7년 전에 죽림교회로 부임했다. 워낙 오래된 교회 건물과 사택이
“장애라는 신체적인 정신적인 불편함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복음 안에, 믿음 안에 차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 또한 신체적인 불편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랑의교회 김상호 목사는 그동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일에 헌신해 왔다. 1994년 7월 16일 대전에서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김 목사는 특수목회가 아닌 일반목회로 목회의 첫 발을 내딛었다. 김상호 목사는 “처음부터 특수목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목회자로 모두가 잃어버린 양이라는 생각으로 사역을 감당했고 제가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장애인 사역을 목회에 추가하며 이뤄진 일”이라며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고 양육하고 불편한 이들을 돌보는 사역에 매진해 왔다”고 설명했다. 사랑의교회가 단독으로 특수 사역을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재정적인 형편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단법인 수레바퀴재활문화진흥회를 알게 됐다. 척수손상을 입은 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정과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해 홍이석 목사를 통해 세워진 수레바퀴재활문화진흥회는 김상호 목사가 추구했던 목회 협력 사역에 귀한 도전이
“끊임없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상처와 아픔을 보듬어 안아주면서 이게 바로 그 분이 우리를 향한 진정한 복음이며 사랑이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교회는 자랑하고 내세우는 곳이 아닌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서 묵묵히 예수님을 몸과 마음으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목회자 자녀가 가지는 갈등 중에 하나는 부모님의 목회 소명을 바라보며 ‘나도 그 길을 걸을 수 있을까?’이다. 유성훈 목사도 부친의 목회 사역을 묵묵히 지켜보며 ‘나는 이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진 목회자 자녀였다. 시골교회의 담임목회자로 섬겼던 부친의 곁에는 항상 물질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성공해서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으로 일반 대학(음악대학)을 진학하고 새로운 길을 준비했던 유 목사는 어머니의 권유로 마지못해 참석한 연세중앙교회 흰돌산 수양관에서 사도 바울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됐다. 강단 정면으로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예수님의 형상을 보게 된 유성훈 목사는 그 자리에 꼬꾸라지며 회개의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아버지 목사님의 크신 은혜를 외면하고 그 은혜를 모르는 자식이었다는 마음으로 회개한 그는 일반대학을 마치고 신학도의 길을 걷게 됐다. 이어 경기도 광명시 다사랑교회에서 유상채 목사와
“홍성교회는 빛의 자녀로 사회와 예배, 가정, 통일, 열방과 환경을 향한 선한 이웃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DNA를 간직한 공동체로서 교회와 성도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내며 성도들과 두 손 꼭 잡고 걷고 싶습니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 1954년 한 가정집에서 시작한 홍성교회가 교회 창립 69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홍성지역의 낮고 소외된 이들을 향해 나눔과 섬김, 사랑을 실천해온 홍성교회는 현재 2013년 최윤종 목사가 사역하고 있다. 특별히 본인의 고향 모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최윤종 목사는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와 지역사회를 품는 마음으로 10년의 시간을 보냈다. ‘행복한 성도’ ‘영향력 있는 공동체’를 꿈꾸며 홍성교회는 △사회 속에서의 선한 이웃 △예배 세움 선한 이웃 △가정 세움 선한 이웃 △북한을 품고 복음통일을 사는 선한 이웃 △열방과 환경선교를 살아가는 선한 이웃으로 나아가고 있다. 최윤종 목사는 “지방에 위치한 평범한 교회이지만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고 복음 중심의 사역에 뜨겁게 사역하고 있다”며 “모든 사역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교회의 기초가 되는 말씀사역과 다음세대를 양육하며 세우는 사역이 소중하지 않을까
붉은 황토빛 논밭이 시원스레 펼쳐진 상하면을 지나 삼광교회(윤보열 목사)는 40여년을 그곳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서 있었다. 1983년 4월, 김범일 전도사는 이곳에서 주님의 목회를 생활로 실천하며 시작했다. 정말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주민들을 계몽하며 땀과 눈물로 목회하기를 수십년, 그동안 교회는 대내외적으로 역량을 갖추며 든든해졌고 하나님은 이제 그 바탕 위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성장과 성숙의 장으로 이끌기 위해 2014년 1월 2대 담임목사로 윤보열 목사를 이곳으로 부르셨다. 9월의 맑은 가을날 지역사회에서 사람을 세우고 지역을 섬기며 목회하고 있는 윤보열 목사를 만났다. ● 간단한 목사님 소개를 해주세요.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 6세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공군 부사관으로 9년 6개월을 근무하며 성경공부 하던 중 23세 때 말씀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반석교회(이근영 목사)와 오산중앙교회(이평화 목사)를 섬겼고, 남원강복교회를 개척해 목회한 후 김제 회성교회에서 15년을 목회하고 삼광교회에서 9년째 목회하고 있습니다. 출생부터 여기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걸음걸음 은혜와 축복의 여정이었음을 고백하게 되며
농촌교회가 가지고 있는 한계는 지역 인구 감소에 따른 성도들의 이동이었다. 성숙한 성도를 세우며 교회를 건강하게 성장시키고 있지만 도시로 삶의 터전을 떠나거나 진학과 학업 등의 이유로 떠나는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생기면서 교회 성장 동력이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1987년에 창립한 원남제일교회도 교회 초기에는 100여 명이 넘는 성도들과 수십명의 다음세대들이 예배하며 전도하고 매일 저녁 모임을 통해 생동감 있는 교회였다. 1999년에 3대 원남제일교회에 부임한 최원석 목사도 성도 중심의 교회 사역을 전개하며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시켰지만 진학과 결혼, 취업으로 성도들이 대도시로 이동하게 되면서 교회 성장은 쉽지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최원석 목사는 “성도들과 함께 매일 기도하고 예배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강조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터전을 떠나는 이들을 보면서 목회의 최대 위기의 순간임을 직면하게 됐다”며 “뚜렷한 방법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보다 철저하게 교회 중심의 삶을 강조하며 흔들리지 않은 신앙관을 세워줬다”고 설명했다. 교회 사역의 변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