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질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지고 하나님께 원망과 불만을 토하지 말자.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시대의 뛰어난 주인공이 되라. 혼인잔치 집에 손님이 되지 말라. 구경꾼도 되지 말라. 뒷일이나 처리하는 자도 되지 말라. 다만 그 집에 주인공이 돼야 한다. (시31:15)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음을 알자.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참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거짓되고 허망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추잡한 인생을 살지 말아야 한다. 알차고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텅빈 인생, 공허한 인생을 살이 말아야 한다.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인생,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바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버려야할 것들이 있다. 무기력한 사람은 생의 의욕이 없다. 적극적인 정신과 능동적 자세가 부족하다. 썩은 물고기가 탁류에 떠내려가듯이 인생을 무의도식 속에서 힘없이 살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은 맑은 눈과 기쁘고 환한 얼굴로 정열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또한 무관심한 사람은 삶의 목표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 무사안일 속에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의 대하여 열의가 없고 성의가 없다면, 불성실한 태도로
우리 사회는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한 근대화 과정을 겪어왔다. 이로 인해서 여러 측면에서 사회적 변화를 초래하게 됐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가족의 변화라 할 수 있다.가족이 변화되는 양상은 가족의 구조적, 기능적, 변화로부터 가족관계의 변화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고 변화속도도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가족의 구조적 측면에서 가구규모가 축소됐고 가족의 형태적 측면에서는 부부중심가족, 이외에 편부모가족, 독신 가구, 노인1인 가구, 소년소녀가장 가족 등 다양한 가족 형태가 등장하게 됐다.그리고 가족의 기능적 측면에서는 가족의 생산기능과 보호기능, 사회학 기능 등이 약화되게 됐다. 가족의 관계적 측면에서는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노부모와 자녀관계는 과거의 권위적이고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변하고 있으며 또한 부모와 자녀 관계중심의 가족관계에서 부부관계 중심의 가족관계로 변하고 있다.그런데 우리사회의 이러한 급격한 가족관계의 변화는 가치관의 혼란이나 가족 간 갈등을 심화시켜 가족 내의 심각한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최근 발생한 우리사회의 총체적인 경제위기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가정이 늘어나면서 가족 내에서 가족 간
지난 주간에 성도님 한 분이 대전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서 성도 몇 분과 함께 심방을 다녀왔다. 심방을 다녀 온 후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환자의 상태가 나빠서가 아니고 함께 다녀오신 성도님 한 분 때문이었다. 그 분은 왕복 두 시간 반 동안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원래 평소에도 말씀이 없으셨던 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가 나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 성도님은 치매가 진행 중인 분이셨던 것이다. 육 개월 전에도 서울을 다녀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사이 치매가 더 진행된 것 같았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셔서 찬송가도 열심히 부르곤 해서 그 정도까지 진행되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는데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어쩌다 한 번씩 미소 짓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가만히 생각해보니 요 근래 그 분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배 끝나고 나가면서 나에게나 다른 성도들에게 건네던 인사말을 그냥 웃음으로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이 없어진다는 것은 치매의 대표적 증상 중의 하나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분은 우리 교회에서 그야말로 ‘기둥 같은’ 일꾼이었다. 그런데 삼 년여 전부
지난 달 말 미국 센트럴플로리다대(UCF) 서비스경영학과의 정모 조교수가 수업 중 “너희들 다 죽어가는 표정인데, 내가 지금 무차별 살인(killing spree)이라도 저지르는 거야, 뭐야?”라는 발언을 했다가 한 학생의 고발로 학교 당국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이에 대해 정교수는 “당연히 농담이었다. 학생들도 함께 웃었다”라고 징계의 부당함을 주장했지만 징계는 철회되지 않았다. 최근 수원의 한 교회 목사가 설교 중에 부적절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인권위원회의 징계를 받고 법원으로부터는 그 징계 조치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목사는 설교 중 “하와가 사과 2개를 몰래 따서 삼켰는데 씨앗은 소화가 안 돼 뱃속에서 점점 올라와 이것이 가슴이 됐다”며 “여자의 치마와 설교는 짧을수록 좋다”고 했다. 이에 성적 굴욕감을 느낀 성도가 인권위에 진정을 했고, 인권위는 목사의 언행이 성희롱이라고 판단했고, 해당 목사는 “성희롱 의도가 없었고, 혐오감을 느낄만한 언동이 아니었다”며 인권위의 징계조치를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했지만 법원은 “언동이 성경과 전혀 무관한 내용으로 여성의 노출과 신체를 비하하는 내용이었던 점 등에 비춰 이로 인해 신도들이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고
인생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가지고 한 번뿐인 생애를 보다 확고한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보람 있는 인생과 행복한 생애를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목표도 서있지 않고 삶의 자세도 확립되지 않을 때 보람 있는 인생을 살 수 없다. 세상은 너무나 급속히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반석위에 세운 집처럼 든든히 서 있어야 한다. 결단코 붕괴되지 않는다. 뿌리가 약한 나무는 바람에 쉽게 쓰러진다. 믿음이 깊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에 바람에 흔들린다. 말씀에 깊이가 없는 자, 기도의 깊이와 영교가 깊지 못할 때 육신의 바람에 넘어진다. 힘없는 집은 폭풍에 무너진다.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기도로 강한 자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불능하시다. 그러나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강하고 모진 바람이 몰아 처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진 환란과 시험 속에서도 만세반석처럼, 뿌리 깊은 나무처럼 늠름하게 서야 한다. 긍정적인 사고와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야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살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다. 기쁜 노래를 부르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가정의 달 5월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가정과 학교 등에서 따뜻한 정을 확인할 수 있는 행사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기념일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냈던 가정과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은 급속한 산업화와 이기주의 때문인지 어느 시점부터인가 가족의 대화가 단절되고 끈끈한 유대도 사라져 가고 있으며 부모, 스승에 대한 존경심도 예전 같지 못하다. 아이들을 학대하고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고, 또한 우리 주변에서 무관심과 냉대로 소외되어, 홀로 사는 독고노인의 문제는 앞으로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나가야할 문제로 자리 잡게 됐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가정, 학교, 우리 이웃의 따뜻한 정을 복원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개인 이기주의적 생각을 버리고, 사회의 구성원, 공동체 의식을 먼저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 간에 격려하고 믿음을 주고, 학교에서는 제자를 사랑으로 다스리고 스승에게는 존경심을 보여야 하며, 더욱 우리 이웃 외롭고 쓸쓸하게 소외된 독고노인들을 비롯하여 소년 소녀가장 등 불우한 이웃을 살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 주변을 사랑하며
며칠 전 국제선 항공에서 모기업의 임원이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SNS에 퍼지면서 일파만파가 되었고 결국 그 임원은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사건은 지난 15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대한항공 국제선 항공기 안에서 벌어졌다. 대한항공에 따르면 당시 비즈니스석에 탑승한 포스코에너지 상무급 임원 A씨가 기내 서비스 등을 문제 삼아 여승무원에게 폭행을 행사했다. 이 사건이 20일 일부 언론에 보도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당시 상황을 정리한 것으로 추정되는 카카오톡 화면 갈무리 자료가 퍼지면서 파문이 확산됐다. 이 자료에 따르면 A씨는 탑승하자마자 자신의 옆자리가 비어있지 않은 것을 문제 삼기 시작해 아침식사 메뉴, 기내 온도 등 줄기차게 불만을 제기했다. 심지어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따로 삼각 김밥과 라면을 주문해놓고 라면이 제대로 익지 않았다며 수차례 다시 끓여오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급기야 A씨는 두 번째 식사 서비스 과정에서 읽고 있던 잡지책 모서리로 여승무원 눈두덩이 쪽을 때렸다. 그러나 기내 사무장이 가격 사실을 확인하려들자 자기가 책을 들고 있었는데 승무원이 와서 부딪혔다며 폭행 사실을 부인했다. 이 같은 일은
오늘도 자유로이 흐르는 한강을 지난다. 전철의 창가에서 보이는 가장 사랑스런 벚꽃나무 가지에 연분홍 꽃잎을 매달고 서있는 한강변의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활짝 핀 벚꽃 구경하기 위해 서울의 시민들은 여의도를 향해 나들이를 나서는 봄이 아닌가. 그곳에 우리 총회의 빌딩이 건축되어지는 것에도 감사를 드린다.얼마 전까지 우리는 어디서나 앉으나 서나 전쟁의 소문으로 한반도는 어려운 난국에 처해 있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될까?’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세계 종군기자들이 280여명이 몰려와서 전쟁이 일어날 때의 ‘특종’를 위하여 체류하고 있었다. 우리는 분명 국가적인 위기를 맞고 있었다. 외신에서는 한반도에서의 최악의 분위기가 고조 되어있다고 보도했고, 언제 충돌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계의 화약고로 전쟁의 소문은 널리 퍼져있었다. 언제 북쪽 지도자의 오판으로 미사일을 발사할지 세계의 눈이 집중됐다.전쟁의 소문이 늘어갈수록 우리 크리스천이 해야 할 것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기도할 때이다. 성경 속의 구약의 스토리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은 위기와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하나님께 나라를 위하여 간청할 때마다 하나님은 도움의 손길을 펴주셨
자기 길을 가는 사람도 처음부터 자기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파란만장한 삶과 절치부심의 고뇌 끝에 자기 길을 찾은 것이다. 내가 걸어가는 길 ‘My Way’는 내 이야기 ‘My Story’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만의 고유한 역사(My History)를 축적해 나갈 때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방탕하게 시작해 방도에 이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나의 길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할 일은 대책 없이 ‘방탕(放蕩)’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방탕’은 방만(放漫), 방자(放恣)와 친구 사이다. 다시 말해서 가까운 사이라는 뜻이다. 맺고 끊는 데가 없이 제멋대로 풀어져 생활하는 ‘방만’이 ‘방탕’을 부채질 한다. ‘방탕’은 자만과 교만을 수준을 넘어 오만방자한 상태로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욕망을 쫓아 생활을 하는 것이다. ‘방탕’을 어느 정도 경험한 사람이 만나는 6방 시리즈 중에 두 번째 방은 바로 ‘방랑’이다. ‘방랑’은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표류(漂流)나 유랑(流浪)이다. 뚜렷한 목적의식 없는 떠돌이 생활이기에 그 끝도 쉽게 보이지 않는다. ‘방랑’은 방류
소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하 포차법)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4월 19일부로 법안을 발의한 3명의 국회위원 중 2명이 철회 의사를 밝혔음에도 현재 포차법과 관련한 논란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포차법은 분명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문제 즉, 기독교와 반기독교, 또는 기독교 내부의 대립으로 몰고 가려는 일련의 흐름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철회한 두 의원은 철회 이유를 법안의 문제점보다는 기독교의 집요하고도 악의적인 반대운동 때문이라고 밝혔고, 두 의원의 법안을 하나로 합쳐서 다시 발의하기로 했다. 일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 또한 ‘성경에는 동성애를 죄라 말하지 않는다’,‘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동성애 때문이 아니다’,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다시 논의해 봐야 한다는 기독교 내부의 목소리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등의 이유로 이 법안의 조속한 제정을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있는 실정이며,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의 철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 법안을 반드시 올해 안에 국회에 상정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어 소위 포차법 논란은 앞으로 점점 더 가열될 것으로 보
얼마 전 대한민국 국회의원 몇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가 보류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산된 것이 아니고 보류된 상태다. 언젠가는 다시 불거질 수 있는 사안인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의식이 살아있는 지식인들과 양심적인 법조계 인사들, 교육계의 신앙인들 수많은 사람들이 차별금지법 통과 저지를 위해 협조해 줬다.이제 다시 법안 제출이 되지 않고 폐기처분될 때까지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투쟁해야 할 것이다. 동성애법이 통과된 역사적 배경을 보면 미국에서 가장 먼저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한 곳이 메사추세스 주로 2004년 인정했다. 당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것에 대한 결과가 어떨 것이라는 것을 예기치 못한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들은 캘리포니아에서 Prop. 8 제정에 대한 정쟁을 할 때 확연히 드러났다. 메사추세스에 있는 많은 기독교 가정들이 캐리포니아 사람들에게 절대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지 말 것을 강력히 격려하며 응원해 줬다고 한다.이제 동성애 결혼 합법화가 9년이 된 메사추세스에서는 주정부 법으로 성전환자들의 성정체성과 상관없이 그들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황당한 법들이 통과될 때마다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은 다름 아닌 자녀들이 공부
세계적으로 한국에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자가 20명, 자신이 재림예수라고 부르는 사람이 50명 된다고 한다. 주요 특징은 신비주의적이고, 자신이 신과 합일했다고 주장한다. 신과 합일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적 신앙 행태는 한국 개신교계 소종파의 주요 특징이다.지난 2000년 문화관광부의 의뢰로 국제종교연구소가 발간한 보고서 ‘한국 종교단체실태’ 조사연구에서 개신교 계통 소 종파를 크게 신비주의, 종말론, 외국계 신흥종파 3가지 계열로 분류하고 있다. 이 가운데 수적으로 가장 우세한 것은 신비주의 계열이다. 신비주의 계열은 다시 귀신분파, 신비주의 기도원분파, 직통 계시파, 전도관 분파, 장막성전 분파, 통일교 분파로 나뉘는데, 최근 기독교계가 대대적으로 배척운동을 버리고 있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은 장막성전 분파에 속한다. 장막성전은 1960년대 과천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서울대공원이 들어선 막계동 일대가 이들이 말하는 ‘성지’다. 신천지 교회 본부가 과천에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장막성전은 1966년 한국 소 종파운동 사상 가장 나이가 어린 유재열(당시 17살)이 세워 화제를 뿌렸다. 장막성전이란 이름은 요한계시록 15장 5절 “또 내가
아프리카 발톱개구리는 세상이 물과 진흙이라 생각한다. 팔마토게코 도마뱀은 세상이 모래와 이슬이라고 알고 있다. 북극 여우는 이 세상이 눈과 얼음 그리고 동굴이라고 믿고 있다. 만약에 아프리카 발톱 개구리와 팔마토게코 도마뱀과 북극 여우가 만나서 ‘이 세상이 무엇이냐’라는 주제로 공방을 펼친다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팔마토게코 도마뱀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살아온 세상을 설명한다고 해도, 또 북극 여우가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해도 자신이 보고 듣고 느껴온 세상을 벗어나기란 좀처럼 쉽지가 않아서 아마도 결론이라는 것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세상밖에는 알지 못하니까. 그것을 기준으로 설명하고 듣고 느끼면서 상상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어쩌면 갈등이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아무도 속임수를 쓰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진 것뿐인데 그런데도 갈등은 시작되고 싸움은 벌어질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서만 안다. 그러니까 내가 ‘안다’라고 믿고 있는 건 그냥 ‘내가 아는 것’만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내가 아는 것’만 ‘아는 것’이 옳지 못하다면 우리들의
1793년 단두대를 붉게 물들이며 루이16세를 처형한 프랑스 혁명정부가 ‘프랑스 인권 선언’에서 언급됐던 ‘자유’, ‘평등’, ‘권리’는 1875년 ‘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자유, 평등, 박애’로 바뀌게 됐다. 그리고 1973년 파리시 집정관 회의에서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칠 만큼 사람을 매혹시켰던 이러한 이념들은 창세기 11장의 니므롯을 연상케 하듯이 철저한 인본주의라는 거대한 거인 우상을 탄생시켜 세상을 지배하게 했다. 소위 ‘인간존엄’이라는 그럴듯한 가치들이 세상의 중심 가치로 자리 잡으며 르네상스 시대 이후 세상은 사람 냄새로 진동하게 된 것이다. 세상이 그토록 칭찬하며 노래하는 ‘자유, 평등’이라는 말은 지극히 저항적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그럴듯한 다른 모양으로 우리 곁에서 군림하고 있다. 그들이 외친 ‘자유’는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물론 당시 혁명 이전 앙시앵 레짐 체제 하에서 제1계급이 추기경과 로마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이었으니 어쩌면 이런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간단하지 않은 생각들이 사람들의 내면에 당연함으로 자리 잡았다.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은 그 아래 급인 왕(
옛날 어느 고을에 시어머니의 등살에 못살겠다는 며느리가 집안 아저씨께 자기의 고충을 하소연했다. 아저씨는 며느리에게 약을 몇첩 지어주면서, “이 약을 달여 드리면 시어머니의 수명이 단축될 것이니 마지막으로 공을 들여 모셔 보라”고 말하며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돌아온 며느리는 열심히 달여 드렸고 아저씨가 일러준 대로 공손히 받들면서 공양을 했다.그런데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시어머니는 더욱 건강해졌고 며느리의 변한 모습을 보고 온 동네에 다니면서 며느리 애기를 했다. 들려오는 소식은 늘 며느리를 칭찬하는 말 뿐이었다. 예전과는 달리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즐거워진 며느리는 다시 아저씨를 찾아갔다. “우리 시어머니가 더 오래 사셔야겠어요”하며 이번에는 보약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사실 지난 번에 준 그 약이 바로 보약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무서운 병을 앓고 있는 한 여 성도가 있었다. 그 성도는 병을 고치기 위해 여러 병원을 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방간 목사님이 물었다. “누구를 심하게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제서야 심한 통곡을 하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목사님 사실 저는 제 남편을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합니다. 미워하면 기도가 막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