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 5장 8절의 “하나님을 볼 것이요”는 시대별로 다양한 해석 변천 과정을 거쳐 왔다. 3세기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보다’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영적인 해석은 우화적 해석이 팽배한 시대의 산물이다. 헬라 철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대에는 ‘하나님을 보다’를 성화 관점에서 해석했다. “하나님을 보다”를 종말론, 영적 그리고 성화의 관점에서 해석한다고 해도 그 의미는 모든 시대를 망라해 하나님의 가시적이고 종말적 현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경향들은 여전히 마태복음 5장 8절의 “하나님을 볼 것이요”를 해석하는 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III. 유대교와 신약 성경의‘하나님을 보다’앞 단락에서 살펴본 마태복음 5장 8절 “하나님을 볼 것이요”의 해석 결과는 하나님은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을 비롯한 유대교와 신약성경은 ‘하나님을 보다’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유대교 관점이란 구약성경과 1세기 유대교 사상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란 마태복음을 제외한 다른 성경에서 ‘하나님을 보다’가 어떻게
야곱은 무한경쟁시대 속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고 무조건 이기기 위해 돌진하고 있는 현대인의 표상입니다. 현대의 많은 목회자들이 어떤 면에서 “동역자”가 더 무서운 목회 환경 속에서 자신의 소명과 사명 그리고 현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야곱과도 같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크게 얍복 나루터를 건너기 전의 전반부와 건넌 후의 후반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생애에 나타나는 목회적 교훈을 살펴봅시다. 1. 야곱은 아주 치열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난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탈취했고,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는 경쟁하고 다투며 자신의 성공과 목표 달성을 향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며 달렸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피신한 후에도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무서우리만큼 참으면서 견뎠습니다. 그렇기에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항상 긴장하며 평안이나 기쁨, 보람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도망치는 도중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 벧엘의 제단을 쌓으며 자신의 생애를 의탁하기도 했지만 그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정당화 될
어느새 한 장밖에 남지 않은 달력이 눈에 들어온다. 무려 11장의 달력을 벌써 내 손으로 다 떼어내니, 올해 내 남은 날이 한눈에 들어온다. 끝이 훤히 보인다. 난 지금 그 마지막 달력의 한가운데에 서있다. 물론 달력이야 새로 걸면 된다. 하지만 정말 이 12월이 내 인생에 남은 날들이라면 어떨까? 지금 난 뭘 해야 할까? 왠지 올 12월 달력은 그 물음을 강하게 던진다. 벌써 재작년 12월, 故강영우 박사가 췌장암에 걸려 그를 사랑했던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e-메일을 보낸 것이 세상에 공개돼 화제가 됐었다. “의료진이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 내게는 한 달 여의 삶만이 허락됐다”고 그는 당당히 알렸다. 그래서 “더 이상의 치료는 중단한다. 차라리 퇴원하여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겠다”고 밝혔다.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박사가 된 자랑스런 인물이다. 조지부시 대통령시절엔 백악관국가장애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 두 아들 역시, 장남은 워싱턴포스트가 선정한 ‘2011년, 최고의 슈퍼닥터’, 차남은 오바마 대통령의 선임 법률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장애를 극복한 성공모델이며, 훌륭한 가장이며, 자
I. 들어가는 말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경 본문 가운데 하나다. 그중에서도 팔복은 성도들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데, 여섯 번째 복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makavrioi oi` kaqaroi; th’/ kardiva/, o{ti aujtoi; to;n qeo;n o[yontai)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얻을 축복을 말한다. 즉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보는”(visio Dei) 축복을 얻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보다’를 매우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을 본 자도 없으며 하나님을 본 자는 살 수가 없다고 말한다(출 3:6; 19:21; 요 1:18). 둘째, 하나님을 보는 것은 축복이며,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볼 수도 있겠지만 죽음 이후에나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도 말한다(욥 19:26; 시 11:7, 17:15). 이러한 상반된 견해는 마태복음 5장 8절의 “하나님을 볼 것이요”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게 됐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볼 것이요”는 종말론 관점에서 해석됐다. 헤거너(D. Hagner) 역시 “하나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을 족장이라 부르면서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 그들의 생애는 믿음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특히 목회자의 삶과 사역의 단면을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이삭에 대해 살펴보자. 사실 이삭에 대해서는 그다지 강조되고 있지 않다. 그만큼 어떤 면에서 평탄하고 굴곡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큰 문제없이 자라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에게도 의미 있는 사건들이 점철되고 있다. 우선 이삭은 약속으로 주어진 자녀였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후사가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아들에 대한 염원이 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들을 약속하셨다(창18:10).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기가 막혀 웃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약속을 지키셨다. 잠시 인간적인 의욕이 앞서서 이스마엘을 후사로 여기고자 하는 실수도 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로 이삭을 주셨다(갈4장). 모든 목회자는 하나님의 약속된 자녀이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섭리 가운데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우시는 사람이
필자는 엠마오 현현 사건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의 어두웠던 영적인 눈을 여시고 그들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세 가지로 제시했다. 부활의 예수께서 두 제자의 영적인 눈을 여기기 위해 하신 두 번째 일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관하여 구약에 “기록된 말씀들”을 그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일이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들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7).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구약에 기록된 말씀들에 기초해 일어났다는 것과 그래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마음에 믿는 믿음도 그 말씀들에 기초해야 한다는 누가의 입장이 부활현현 이야기들에서 모세와 예언의 말씀들과 성경에 대한 반복적인 언급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눅24:25, 27, 32, 44, 45, 47). 엠마오 이야기에서 선지자들에 대한 언급(눅24:25)과 모세와 선지자들에 대한 추가적인 언급(눅 24:27)은 제자들이 메시아가 반드시 고난을 통과하여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필연성을 성경으로부터 인식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기드온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것은 아주 잘 한 일이지만, 지나치게 많은 아내를 둔 것은 잘 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외면적으로는 왕의 권력을 다 포기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삼천궁녀 의자왕과 유사한 인간적인 부귀영화를 다 누렸다고 볼 수 있다. 기드온은 아들만 무려 70명을 낳았으니, 딸까지 합치면 모든 자녀의 수가 약 200여명에 육박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손자 손녀들까지 계산에 넣으면, 그의 후손들이 상당히 많았으리라.왕조국가에서는 왕손이 많아야 보위가 든든하다고 하지만, 지난 역사들을 살펴보면, 지나치게 많은 아들들은 오히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비극의 역사를 야기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기드온의 아들들도 무려 70명에 이르렀으므로 그들 중 한 명 정도는 덜떨어진 아들이 나올 법도 했다. 성경에서는 그 덜떨어진 기드온의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밝히고 있다. 원래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 하는 것이지만, 이 이름은 애굽의 ‘바로’와 같이 왕의 명칭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아브라함과 이삭이 활동하던 창세기 시대에 이미 많이 사용되던 명칭이다. 그리고 차후에 블
해석공동체로서 신앙공동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세 번째 기본 전제는 공동체 구성원의 해석 틀은 ‘중요한 타자들’(significant others)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구성원들의 변화를 위한 인식 재구성(reframing) 과정은 신앙공동체라고 하는 사회적 조건 안에서 사회화를 주관하는 사람들과의 강한 정서적 동일화과정을 상당한 정도로 반복함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신앙공동체 내의 중요한 타자들이 새로운 틀을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사실 신앙적 회심은 신앙공동체의 역할을 앞선 경험이지만 이러한 신앙적 회심의 경험을 계속하여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전의 삶의 상황을 대신하는 근거 구조를 제공하는 신앙공동체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근거 구조를 제공하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중요한 타자들과의 상호작용과 대화에 의해 개인의 주관적인 현실이 바뀌게 된다. 이 과정에는 과거의 모든 중요했던 사건들과 인물들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과정이 동반되며, 과거보다 더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새로운 현실은 기억하고 있는 사건의 재해석을 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의 구조 안으로 수용되게 된다. 2. 해석공동체를 통한
족장들은 믿음의 조상들이다. 공동체의 좋은 전통은 공동체를 강하고 힘 있게 만들어준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유전들은 공동체의 활력을 저해하고 과거지향적으로 만들어 앞으로 나가는 것을 멈칫거리게 한다. 그러나 본질에 충실한 행습은 계승되고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유산이다. 그런 면에서 족장들의 믿음은 모든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목회 지도자들에게 좋은 규범이 된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적이 무조건 바람직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좋은 면은 발견하여 되살린다면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창세기 12-50장에 걸쳐 기록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라고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들 중에서 이 번호에서는 우선 아브라함에 대해 살펴보자. 아브라함의 생애는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과 순종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는 항상 “제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 하는 자세로 살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복의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순종했다. 그의 진정한 생애는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서부터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여호와의 말씀의 좇아 고향을 떠난 것은 나그네가 아니
필자가 신학대학원 강의를 맡고 있을 때 졸업을 앞둔 한 제자가 교회를 개척했다면서 한 번 방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어느 주일 날 나는 예고 없이 그 교회를 방문했다. 그런데 예배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교회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전도사 부부가 주보나 전도지를 가지고 길에 나간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 후에 강대상 뒤쪽 방문이 열리더니 전도사가 눈을 비비며 나오는 것이 아닌가. 말인즉, “아직 신자가 없어서요.”그 무렵부터, 나는 목회학이나 개척론이 학문적으로 지적하지 않는 것 중에서 개척하는 목회자에게 필요한 마음가짐 또는 요건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왔다. 오늘 매우 상식적인 수칙 몇 가지를 제시하는 바이다:1) 개척하면 바로 자기소개가 포함된 인사말을 인쇄해서 교회 인근 주민들에게 배부해야 한다. 직접 전달이 여의치 못할 경우 우편함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2) 후속적으로, 교회 약도와 예배 안내가 포함된 전도지를 제작해서 꾸준히 배포하면서 전도해야한다. 가만히 앉아서 신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통발목회”로 사역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낚싯대든 그물이든 고기 잡을 도구를 챙겨서 “갈 가와 산울 가로” 나가
2. 공동체를 통한 치유의 과정치유공동체는 구성원 각자의 고통과 상처의 의미를 재정의하며 동시에 기존 공동체 구성원과의 동일시를 통하여 공동체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즉 치유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통하여 각자는 이제까지 부정적으로 간주되었던 자신의 삶의 경험들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여 재해석할 수 있다. 또한 치유공동체는 개인들로 하여금 고착된 부정적(병적인) 자기 역할을 벗어나 자신이 진정 원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렇게 될 때, 상처 입은 구성원은 치유자로서의 역할까지도 담당할 수 있게 된다. 치유공동체는 이전에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던 개인의 행동이나 태도를 공동체 내에의 규범과 신앙체계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낙인찍혔던 행동이나 태도의 의미를 긍정적이고도 새롭게 인식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공동체 내에서의 치유의 과정을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입 또는 참가의 단계이다. 문제를 지닌 개인은 치유공동체에 구성원이 되어 공동체 내에서의 규범을 받아들이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에 적응한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힘은 그 개인은 더 이상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자신이 치유의 주체로서 책임이 있음을 깨닫
제사장은 중간에 서 있는 자인데, 특히 하나님과 사람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의 사이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시어, 모든 나라 족속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오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적 책임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장적 책임을 소홀히 하였다.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우월감이 빠져 교만함 속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결함과 존엄성을 잃어버렸고 또 반대로 이방인들이 섬기던 우상에게로 기울어져 영적 타락과 그로 말미암아 기인된 윤리적 타락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패망을 초래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존재가 되어 증인 공동체와는 거리가 먼 나라가 되어버렸다.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 역할은 다른 모든 나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이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도 증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증인이 되기 위한 모임이다. 교회는 흩어져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모인다. 예수님은 교회에게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셨고(행1:8), “모든 족속으로 제
이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네 종류의 나’로 살아간다. 첫째, ‘타고난 나’이다. 엄마 아빠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아 모습, 기질, 재주까지 모두 부모와 닮은꼴로 형성된 ‘나’이다. 이는 선천적 자아로서 그 힘은 매우 견고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런 ‘나’의 모습을 쉽게 벗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느냐’가 중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내 모습에 꼭 그런 ‘나’만 있는 건 아니다. 소위 ‘학습된 나’도 있다. 이는 어릴 적 나의 ‘의미있는 타자’(significant others)로부터 보고 들으며 후천적으로 형성된 ‘나’이다. 어떤 말을 많이 들었느냐, 어떤 장면을 많이 보았느냐, 어떤 것을 많이 경험했느냐, 어떤 습관을 가졌었느냐에 따라 형성된 인격과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느냐’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 안엔 또 다른 ‘나’도 있다. 그것은 ‘의식하는 나’이다. 이는 무언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시작할 때부터 배워서 형성된 ‘나’이다. 이에는 학교에서 배운 여러 지식들을 비롯, 사회생활을 통해 얻은 도덕, 윤리, 법질서에 관한 의식도 포함된다. 또 독서나 영상매체 그리고 개인의 경험을 통해 느끼
III. 치유공동체로써의 신앙공동체의 목회상담적 적용앞에서 살펴 본 목회상담적 신앙공동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적 목회상담의 적용에는 다음의 몇 가지 기본 전제가 바탕이 된다. 첫째, 건강한 개별화가 아닌 건강한 참여 정도가 공동체적 목회상담의 목표이다. 기존의 일반 상담이 자기 이해를 통한 건강한 개별화가 문제의 해결책이라면, 공동체적 목회상담은 개인의 안녕이 소속 신앙공동체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는 관점에 기초해 있다. 둘째, 개인의 문제를 심리내적 요인, 즉 개인적 요인이나 과거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문제의 원인을 신앙공동체의 구조나 문화 등에서 찾는다. 즉 개인의 문제의 원인이 개인적 요소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요인이 있음을 파악하고 신앙공동체가 이러한 개인의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떠한 공동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를 모색한다. 이러한 두 가지 기본 전제를 바탕으로 치유공동체로서의 신앙공동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치유공동체로써의 신앙공동체 치유적 접근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개념이 등장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부터이다. 이러한 치유공동체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신앙공동체의 형태를 비롯한 여러 형태
침례교회가 굳게 붙잡고 있는 교리 중 하나는 “전신자 제사장론”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표현이 “제사장 나라”라고 생각한다(출 19:5-6). 제사장 나라는 제사장 역할을 하는 공동체를 의미하는데, 지난번에는 예배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번에는 서로 돌보는 사랑 공동체로서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한다. 제사장이란 말의 의미는 “서 있는 자”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서 중보자적 사명을 성취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람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짐을 대신 지는 사역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성경은 모든 신자가 서로에 대하여 제사장직분을 실천해야 한다고 선언한다(벧전 2:9~10 참조). 목회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제사장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동시에 주위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격려하고 무장시켜서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적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침례교 목회는 제사장적 역할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제사장적 역할을 하도록 하는 사역을 중시한다. “중간에 서는 자”로서의 역할은 교회에서 서로를 향해 제사장적 사명감을 느끼면서 서로 짐을 나눠지고 담당해주는 아름다운 교제권의 형성을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