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공개방송에 그 출연자가 나올 때마다 나와 아내는 눈을 감는다. 그녀의 음성과 토의 내용은 듣기에 좋으나 그녀의 야릇한 눈초리를 보면 아주 기분이 유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상대방을 바라볼 때마다 눈초리를 밑으로 깔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 올라가기도 하는데 그때 그녀의 흰 눈동자의 움직임은 사람을 경멸하는 듯한 눈초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의 마음과는 완전히 다른 그녀의 눈초리 습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녀가 출연할 때 나와 아내는 눈을 똑바로 뜨고 시청하기로 무언 중 합의를 봤다.
그녀의 눈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인즉 그녀가 어떤 처절한 사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소나기 비 오듯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으로부터 묻어나는 연민의 정을 못 이겨 사정없이 흘러 내리는 눈물을 봤다. 그녀의 눈물의 눈은 아름다웠다.
사람은 사람과의 접촉에서 반응을 표해야 예절을 지닌 인격자이다. 동문(東問)하는데 무답(無答)도 결례일 것이고 더더구나 서답(西答)하면 이건 완전히 사람 무시행위이다. 울 때 울어주고 웃을 때 웃어 주는 것은 인간의 기본 자세이다. 그의 고난과 함께 고난하고 그의 기쁨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약5:13).
예수님의 이 세대 비유를 들어보자.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1:16~17)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슬퍼 울면 가슴을 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세대는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눈물의 구세주이셨다. 성을 보시고 우셨다(눅19:41).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의 죽음을 보시고 우셨다(요11:33~35). 예수님은 육체에 계실 때도 불쌍한 대상을 보시고 반응하셨다(히5:7).
그리스도인은 눈물을 흘리신 예수의 제자들이다. 선생님이 우시는데 우리는 웃고 있지 않은가? 다른 종교 세계에서도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미덕으로 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측은지심 그리고 연민지심(憐愍之心)에서 흘러 내려야 할 눈물이 말라 버린 지 오래지 않았던가?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이 눈물을 흘리자. 그녀의 눈물의 눈은 반짝이는 진주와 같았다.
수류 권혁봉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