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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수비대장 홍순칠

한명국 목사의 회상록

한명국 목사
예사랑교회

조선 말기 당시 관직은 참봉이었던 홍봉조씨는 1850년경 일찍 무인도인 동해의 고도 울릉도(鬱陵島:답답한 언덕 섬)에 맨 먼저 들어와 살았다. 1890년 어느날 배를 타고 남쪽으로 독도(獨島)에 나갔는데 왜놈 어부들이 물개잡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어부들을 몰아낸 일이 있었다고 홍봉조씨의 손자 홍순칠(洪順七)씨는 말했다. 또 직간접으로 1950년초 어려서부터 저가 들어온 독도를 지킨 얘기를 아는대로 아래에 적어본다.


홍순칠씨가 초대 참모통장 최병덕 장군의 호위병으로 복무한 일이 있어고, 6·25 사변중 원산 전투에서 탱크를 타고 수색하다가 부상을 당해 1953년 봄 상사로 제대한 뒤 고향 울릉도에 돌아왔을 때, 울릉도 첫 개척자인 조부 홍봉조씨는 일본 사람들이 독도는 자기의 영토라고 표지판을 세워놓았다고 분노하는 말씀을 들었다.
통일신라때 거칠부 이사부 두 장수의 군대가 동해의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하고 남긴 울릉도 태하동 해변가 석벽의 글씨가 증명한다. 지금도 독도를 일본 영토로 주장하고 있는데 이 글은 자못 조심스러우면서도 역사적 사실이기에 강력한 자부심으로 쓰고 있다. 


당시는 전쟁중이라 외교경로를 통해 항의한다면 유엔군 사령부 지휘하의 국군병력이 일본과의 외교적 분쟁에 휘말릴지 모른다고 방치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그렇다고 만일 일본 영토로 고착화됨을 막기 위해선 민간인의 힘으로라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고 홍순칠씨는 조부 홍봉조씨를 설득해 5000만원의 후원금을 마련해 받았다. 홍순칠씨는 궁리 끝에 배를 타고 포항에 내려 부산으로 내려가 다시 무기 암시장을 둘러보고 우선 수류탄과 탄환을 구입하고, 1개월만에 깜쪽같이 사모은 무기는 박격포와 포탄 200발, M1소총과 칼빈 소총 100정, 중기관포 1문과 경기관포 1문 및 권총 몇 정이었다. 소문나지 않게 울릉도까지 운반하는데 “울릉도 공사장 기구”로 위장하여 배로 을릉도에 옮겨 드디어 그동안 모집한 독도 의용수비대원 모두는 전쟁 때 부상당한 상이용사  80명으로 휴전후인 1954년 3월 27일  독도로 잠입했었다.


도저히 물이 없고 황량한 독도 두섬에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는데 수비행활 수개월 만에 7월 4일 새벽 5시쯤 안개속에 드디어 일본 국기를 펄럭이며 나타난 해상자위대 1천톤급 군함이었다. 결사대장 홍순칠씨는 부대원들로 접근하는 군함을 향해 기관총과 수류탄  공격을 마구 퍼부었다.
군함의 철판이 뚫리지 않았으나 계속 공격하자 왜군은 군함을 급회전하여 도망쳐 버렸다. 수비대원들은 서로 얼싸 앉고 승리에 엉엉 울고 말았다. 나중에 일본신문 기사엔 10여명의 부상자가 생겼다고 했다. 저도 그때 들은 얘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승리의 도취함은 잠깐이요 왜함의 재침을 예감하고 여러 가지 방어준비를 했다. 울룽도에서 소나무를 베어다가 위장의 야포를 만들고 위장망까지 만들어 만반의 준비를 했다. 8월 24일에 외군함 3척이 출현하여 30분간 정찰하고 사라진 후, 드디어 9월 23일 새벽에 외군함 3척이 또 출현했다. 접근하는 군함을 향해 포격하자 또 사라진 후 5분쯤 지나서 드디어 비행기 2대가 나타나자 전대원은 암벽 참호속으로 들어가 비행기가 지나갈 때 경기관총으로 대공사격을 가하자 10분쯤 빙빙돌다가 사라졌다.


이 일로 일본정부는 주일 대표부에 무력도발이라고 엄중 항의하므로 외교적 문제해결을 위해 한국 국회 국방위원회 독도조사단으로 김상돈 의원을 단장으로 6인의 국회의원이 입도하여 소임을 다하고 돌아갔다.
동독도엔 물이 안 나와 서독도에 암반을 폭파하여 물이 나오게 되자 그 후 독도수비대와 어민들은 마음 놓은 어로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울룽도가 낳은 가장 위대한 독도수호의 영웅 홍순칠씨는 당뇨병까지 앓다가 건강이 나빠 53세인가에 돌아가셨다고 들었고 아내 박영희씨는 가정부살이까지 하시면서 고생했으나 지금도 생존하고 계신다고 들었다.


저의 세 번째 외삼촌은 전석봉씨로 어머니의 바로 위의 오빠인데 의사로 을릉도 국회의원을 지내셨고 외삼촌의 부인 홍순임 외숙모의 동생이 바로 홍순칠씨였으므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진학을 못해 외삼촌의 병원에서 의사 조수로 저가 일할 때 가끔 대화 중 그의 군인으로써의 용감성과 독도 사랑에 감동을 받은 바 있었다. 목숨을 걸고 독도 영토를 만들어낸 그에게서 오늘 나는 주님의 나라 영토를 사수하고 구령사역에 얼마나 충성했는지 새삼스레 80년 지난날을 뒤돌아보고 재결심을 다짐해 본다.


홍순칠씨를 생각할 때 미국인 의사 이야기가 떠오른다.
덴버(Denver) 병원의 보조의사로 일하던 이 사람은 럭키 산맥의 기슭에서 혼자 낚시를 하다가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산 위에서 굴러 내려온 커다란 바위가 그의 다리 위에 떨어진 사고였다. 몸을 흔들어보니 조금도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밤이 되며 럭키 산맥의 추위 때문에 자기의 몸이 노출되어서 죽을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보조의사로서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잘 알았으므로, 자신의 낚시 도구 상자에서 나일론을 꺼내어서 정강이를 중심으로 해서 묶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칼을 꺼내어 칼로 자기 자신의 다리를 과감하게 잘라냈다. 그런 다음에 끝에 붕대를 감고 흐르는 피를 보면서 자기의 몸을 끌어서 자동차에 싣고 가까운 마을까지 10마일을 가까스로 운전해서 내려갔다. 그는 큰 상처를 이겨내고 살아났다.


이 사건에 대해서 신앙인 엘리옷은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해 줄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다리를 끊어내고 생명을 구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서 그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했을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도 이 말씀의 뜻을 깨닫고, 주님에게 응답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승천직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 곧 지상명령이요 최후 명령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였고,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라고 고백한  바울 사도의 구령고백을 품고 우리 독자들도 함께 새로운 결단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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