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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도운동과 성령운동과 기도운동

박호종 목사
더크로스처치

신사도 논쟁을 벌이는 분들과 건강한 기도운동, 은사운동, 신사도운동에 대한 구분과 이해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  
어려서부터 제자훈련과 양육을 받으며 침례교신학을 하기까지 침례교 신앙을 배경으로 자라온 저는 복음주의의 한계를 고민하게 되면서, 내 신앙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의 갈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2002년 더콜 운동을 시작으로 소위 신사도 운동이라는 모임과 만났고 10년이 넘게 이 운동에 리더로 투신하며 이를 성장시켰습니다. 그러던 중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 신학적, 신앙적 갈등 끝에 그 자리를 내려놓고 다시 십자가를 외치게 되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 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자로서 책임이 있어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1. 먼저 은사 종지론이나 은사 중단론을 믿는 분들은 이 논쟁에 참여할 조건과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그들은 아예 다른 신학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 분들에게는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여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겸손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을 지켜나갈 성숙의 요구와 과제가 주어졌다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분열이… 주님의 몸을 찢음이… 다름과 틀림의 경계를 벗어난, 아집과 교만 때문에 일어났습니까? 나와 ‘다름’이 다 ‘틀림’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른 종교까지 인정하는 에큐메니컬운동을 하면서, 마치 멋있는 연합을 이뤄가며 넓은 마음을 가진 자처럼 떠들고 행동하지만, 은사에 대한 태도나 열림에는 중세의 마녀 사냥꾼처럼 혈안이 되는 것이 얼마나 이중적이며 모순입니까? 은사운동을 이단이라고 한다면 한국교회의 4분의 3과 예수전도단과 같은 세계적인 단체들이 다 이단들이고 신사도운동입니다. 


2. 신사도 운동과 성령은사 운동 의 구분
기본적으로 신사도운동도 은사운동도 모두 성령의 모든 은사를 인정합니다. 성령을 제한하지 않고 성령의 모든 현재적인 역사를 믿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인정하고, 성령을 사모한다는 분들이 다 신사도운동은 아닙니다. 신사도운동의 핵심은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사용하는데 있습니다. 더 분명한 경계는 사도를 목사안수 주듯이 안수하여 세우고, 사도적이라고 하지 않고 사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최고의 권위에 사도를 두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순절적 성령은동과 과거 은사주의 운동과 신사도운동의 경계가 나누어지고,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운동과 구분된 신사도운동이 나누어집니다. 성령을 극단적으로 인정하는 그룹이 다 신사도는 아닙니다. 유사 할 수는 있습니다.


사도적이냐? 사도냐? 사도적 지도자로 칭하는가? 사도라고 칭하는가? 사도적 은사와 기능적 회복이냐? 사도직을 회복하고 사도를 세워 사도라 칭하는가가 결정적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운동이 다 신사도운동이 아닙니다. 성령을 인정하고 은사를 인정한다고 다 신사도로 매도한다면 한국의 모든 기도하는 교회, 성령의 역사가 있는 뜨거운 교회는 다 신사도운동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에 절반 이상이 다 신사도인 것입니다.


3. 신사도운동과 은사주의 운동,
   뜨거운 기도운동의 구분 …

세 운동은 서로 유사한 부분은 있을수 있으나 서로 관계는 없습니다. 세 운동의 공통점이 있다면 성령의 모든 은사와 사역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세 운동의 다른 포인트는 신사도운동은 사도직의 회복, 교회의 구조와 직임들, 성령의 현상에 중요한 관점이 있다면, 기도하는 교회 또는 기도의집 운동은 회개를 통한 부흥, 부흥을 통한 선교운동, 주님의 다시 오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습니다.


결정적인 상이점은 사도를 사도로 부르고 선지자를 선지자라 부르고 세우느냐? 사도적으로 부르고, 선지자적으로 부르고 그 기능의 회복을 말하느냐? 어떻게 부르고 이해하는가가 핵심 문제입니다. 즉 사도를 세우는가? 세우지 않는가?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집 운동은 사도를 세우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니 굳이 세워야 하는 필요성을 못 찾을 뿐 아니라 그것은 위험한 일이며 경솔한 일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적 교회, 1세기 교회의 회복을 꿈꾸는 것은 문제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1세기 교회의 사도를 성경에 있기에 다시 세운다. 무엇이 문제냐?”는 식의 단순한 질문에 대하여는 논란의 요지가 많이있습니다.


교회의 문화와 운영체계, 구조와 가치는 기존의 옛부대 시스템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사도의 직임만을 세우고 그 권위만을 취하는 것은 오류이며 1세기 교회의 영성, 1세기 교회의 문화, 1세기 교회의 구조와 형태를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진정한 1세기는 취하지 않으면서 권위 구조만, 은사적 나타남만을 가지고 사도를 세우는 것이 1세기 교회의 회복이라 볼 수 없고,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에 혼란을 가져오는 경솔함이요, 많은 부작용과 악용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다 성숙하지 않은 은사와 절대 권위를 합한 사도직제의 회복은 과이성경적이라 할수없습니다.


 4. 한국의 뜨거운(?)복음주의와 신사도운동.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에 임한 오순절적 강력한 성령의 불로부터 시작된 부흥으로, 이 부흥은 길선주의 회개로부터 시작하여 강력한 회개운동으로 시작하여, 사회변혁과 이후에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부흥으로 이 부흥의 영향력 아래에서 성장한 한국교회는 오순절적, 혹은 은사주의적 복음주의로 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뜨거운 기도와 말씀의 강독, 강해가 기본이된 사경회  이로인한 뜨거운 회개를 통해 길선주, 최권능, 이용도, 김익두, 이성봉, 신현균, 원로 최복규, 김충기, 오관석 목사 등의 성령의 사람들에 의해 한국교회의 2/3가 세워졌고, 지금도 절반 이상이 그 영향권 아래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신사도 논쟁으로 마치 모든 기독교가 은사중단론적 입장이거나, 은사를 인정하면 오류에 빠진 것처럼 몰아가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또한 신사도 운동이라는 프레임에 모든 성령운동을 몰아넣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뿌리와 영적유업을 잃어버린 신학적 논쟁과 교회정치에 이용되고 우리의 근본중 하나를 부정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충만하고 뜨거운 교회 모두를 신사도로 보고 몰아가는 것은 바르지 않고, 또 한국교회의 모두가 은사중단이나 은사종지론을 주장하지 않고 있음에도, 그렇게 단죄하여 마녀사냥 하듯이 몰아내어 건강한 기도운동이나 은사운동까지 무너뜨려 뜨겁고 야성적이고 종말신앙적이고 전투적인 신앙을 모두 광신도 취급을 하거나 이단시하는 분위기와 풍조는 우리의 엄청난 믿음의 유산을 잃어버리고 현재의 난국을 헤쳐나갈 에너지와 열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사단의 전략에 말려드는 자중지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뜨거운 한국의 기도운동과 청교도적 부흥운동을 현대 미국제 복음, 미국제 번영주의적 은사운동으로 대표되는 신사도운동과 분리, 구분 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부흥이 필요한 한국교회안에  뜨거운 교회 살리기 및  건강한 기도운동과의 분리 및 분별이 중요한 사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결론적으로..
한국 땅에 20여년 전 빈야드운동을 뿌리로 한 신사도운동이 하나님 나라와 한국교회에 십수년동안 기여한 것이 무엇이며, 얼마나 열매가 있는가? 또 앞으로 이 운동은 지지되고 장려되어야 하는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부흥을 위해 필요한가? 신사도 운동에서 외치는 부의 이동, 임파테이션, 사도 안수등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가?


10여년 가까이 이 운동의 핵심 리더로서 사도안수도 받아본 자로써 나름 한국교회에 성령의 불을 붙이고자 이 일에 투신했던 시간들을 뒤돌아 보며, 이 운동을 평가합니다. 우리에게 득이 되기보다 실을 더 많이 가져왔고 앞으로 더욱 큰 폐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게 되었고..“우리에게 큰 유익이 없었다” 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 운동에서 소개되는 미국 강사들중 많은 경우 신학적 기반과 소양이 부재하고 고민되지 않은 자기체험 중심에 자의적 성경해석들, 기도와 말씀의 씨름없는 얄팍한 실용주의적 해석과 뿌리를 알수없는 현상주의, 또한 많은 경우 인파테이션의 이름으로 값싸게 신령한 것들을 취하고 싶은 비 인격적 영적 욕망들… 이것들은 우리의 청교도적 기도의 유산, 순교적 삶의 유업들, 특히 십자가의 삶과 정신과 반대로 향하며 교묘히 신앙을 변질시키는 작용을 했습니다.  


부의 이동을 그렇게 강조했고, 능력을 그렇게 강조했지만 그것으로 부흥한 교회가 있는가? 물론 미국에는 사도적 교회를 지향하는 성장한 교회들이 소수 있으나 가히 샘플 이라하기엔 미흡합니다. 또 부의 이동으로 구제와 선교에 헌신과 열매가 있었는가? 기복적 욕심에 끌려 복을 줄 사도의 발 앞에 재물을 바치는,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는 재물, 한두명의 재산을 늘려주기는 했습니다. 결국 기복과 맘몬적인 욕구로 사람들의 왕국만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오히려 진리의 혼동과 왜곡, 건강한 성령운동과 기도운동의 장애, 배금주의와 혼탁함, 윤리성과 인격성이 결여된 현상주의였다고 고백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십수년의 사역의 후미에서 다시 십자가를 외칠 수 밖에 없었던 갈등과 처절함을 회개함으로 돌아보고 건강한 말씀 중심의 기도운동과 성령운동, 십자가를 통과한 성령과 기도가 이 나라 교회 안에 절실히 필요함을 강하게 느낍니다.  끝으로 개인적인 많은 시간 고민과 내부 동역자들과의 상의 끝에 내가 걸어온 십수년과 나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을 이들에게, 한국교회에 아무것도 아닌 자이지만 회개의 마음과 부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그 시기, 그리고 지금 그럼에도 나를 기다려 주시고 신뢰해주시고 믿어주신 귀한 선배님들, 동역자들, 친구들, 후배님들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계속 십자가길로 달려갈 수 있도록 중보와 기도, 축복의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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