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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변술과 설교

조대식 목사
신태인교회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가장 각광 받는 사람은 웅변가였습니다. 이 웅변가들은 대중들이 운집해 있는 광장이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민회나 심지어 엄숙한 법정에서까지 이 웅변가들은 유창한 웅변술로 광장에 모여 열광하는 군중들을 설득시키기도 하고, 통치자들의 국정의 중차대한 정책을 전달하기도 하고, 법정에서의 첨예한 송사를 유리하게 판결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이 웅변술은 출세의 필수적인 요건과 지름길로 인식했습니다.


그 시대에 가장 뛰어난 웅변가들은 대부분 아테네를 중심으로 종교처럼 널리 확산됐는데 이 웅변술의 이론과 체계를 정립한 화법연구가 바로 당시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시칠리아 섬에서부터 시작된 수사학(修辭學)입니다. 이 웅변과 수사학은 그 시대 고등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채택되어 세속적인 출세의 야망을 가진 귀족들과 상류층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자녀들을 유아기부터 이 수사학과 웅변술을 가르치려고 앞 다투어 수사학교에 입학을 시켰다고 합니다.


이러한 웅변과 수사학에 대한 시대적이며 사회적 열정의 열매로 후에 플라톤의 서정적 대화인 “향연”이나, 이론철학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같은 고전문학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어 불세출의 철학자들을 양산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웅변술에 대한 또 하나 재미있는 일은 보헤미안들 중에서도 웅변에 능한 사람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집시라고 불리던 이들은 15세기 유럽지역의 유랑민족으로 체코의 서부 한 지역에 모여 살았는데 그 지역의 지명이 보엠인 이유로 그곳에 사는 이들을 프랑스어로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게 됐는데, 이 보헤미안들도 이 웅변술을 귀중히 여겨 자녀들을 훌륭한 웅변가로 만드는데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그들은 자녀들을 수사학교에 보내는 대신에 여우의 혀가 능변가(能辯家)로 만든다는 미신을 따라 아들을 데리고 학습을 하듯 여우사냥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실제로 이 보헤미안들 중에는 뛰어난 능변가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목사로서 이 이야기와 함께 문득 설교사역을 생각하게 됩니다. 목사의 목회 사역 중 가장 중요한 분야가 설교이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설교를 잘 할 수 있는지? 그 방법과 스타일이 사람마다 다르니 어느 방법과 스타일이 표준이라고도 할 수 없는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하며 애매한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설교에 웅변술이 필요할까?’,‘웅변술은 설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가?’ ‘설교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전하는 언어의 수사학과 표현하고 전달하는 기술은 중요하지 않은가?’ ‘설교를 잘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떤 분은 듣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박력이라고는 없이 조용히 하는데도 교회가 부흥되고 어떤 분은 그 한 시간의 설교를 생의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온 몸과 힘을 다하여 교회가 부흥됩니다.
그런데 나는 조용한 스타일을 따라 해도 나의 목회 현장이 부흥되지도 않고, 목숨을 걸다시피 열정을 실어도 나의 목회 현장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니, 이러한 현실 때문에 목회자는 스스로 낙담하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스 시대의 웅변가들이 좋은 수사학교에서 공부를 하듯이 좋은 신학교에서 공부를 해야 하나? 미신을 믿던 보헤미안들처럼 여우사냥을 해서 여우 혀를 먹듯이 죽자고 기도하여 신비체험이라도 해야 하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설교를 잘할까? 설교자인 내가 문제일까? 아니면 성도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공부를 더 해야 할까? 아니면 기도가 부족한가? 독서를 더 많이 해야 하나? 누구든 설교자라면 이와 유사한 고민이나 갈등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영국의 침체 시대에 웨일즈의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던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에서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고 했는데, 목회자나 설교는 인간의 천성적인 성품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거듭나고 변화되는 전인적 구원을 통해서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때, 나는 만들어진 설교자인가? 태어난 설교자인가?


예레미야서 23장에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 “하나님이 이르신 말씀”이라는 다소 단순한 논리로 설교자와 설교를 정의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라고 택하여 보낸 그 사람과 보내신 일이 없는데 스스로 선지자로 자처하는 사람, 하나님이 주님 말씀을 전하는 자와 자기 생각에서 나온 말을 하는 말씀 이 두 가지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이러한 단순 논리로 목회자와 설교는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목회자가 다 소명을 받아서 목회자가 되었다고 해도 실제로 하나님이 부르신 자와 자기 스스로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로 구분돼야 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라고 택하신 사람이라면 전할 말씀을 주시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한 사람은 어느 때에 무슨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도 분명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이와 같은 관계에서 중요한 요인은 이 세상과 현실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그 관(觀)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소위 어용선지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관으로 세상과 현실을 보고 백성들에게 평강과 축복을 예언했습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순전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멸망과 항복을 백성들에게 촉구했습니다.
목회자로서 이 시대의 교회의 현실과 국가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보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전해야 할 메시지는 세속적인 차원의 수많은 방법일까?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렘21:8)뿐인 복불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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