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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아!

한명국 목사의 회상록

한명국 목사
예사랑교회

“내가 뒤돌아보니 너한테 잘못한 것이 너무 많다. 다 잊어버리래이….” “어머니 별말씀을 내가 엄마한테 애먹이고 잘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다 용서하시고 먼저 천국에 올라가시이소. 마지막 소천 기도를 올립시다.” 봄에 위암의 진단을 받으시고 8개월쯤 지나 흔들의자에 앉아 기도 중에 조용히 임종하신 어머니 앞에 눈물을 흘린 기억이 어버이날이 올 때마다 새롭다.


어려운 울릉도 주사골 농촌 살림에 10남매를 낳아 아홉째 아들은 어려서 일찍 보내고 9남매를 키우느라 수고하시다 절간을 접고 40세에 중병이 들어 교회에 나가든 중 “하나님요, 날 좀 70세까지만 살려 주시이소!”라고 간절한 기도에 응답받아 30년을 더 사시고 만 70이 되어 소천 앞에 모자간에 회개하고 먼저 천국가신 어머니의 “야! 이 자식들아, 너희들도 커서 장가가고 시집가서 자식새끼 낳아 키워보면 그때야 내 마음을 알끼다!”고 가끔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아래에 떠오르는 이야기는 저의 경험의 거울처럼 잊을 수 없는 교훈이었다. 설빔으로 받은 옷을 화롯가에서 태워 버린 날 밤새워 울던 동생을 보고 다시 사 줄 테니 울지 말라며 위로하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이번 설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 드시라고 사다드린 귀한 음식을 내 앞으로 내미셨다. “난 아까 부엌에서 많이 먹어 배부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것은 어머니 사랑인 것 같다. 나를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시는 병든 내 어머님은 그 누가 뭐라 해도 이 세상 가장 소중한 나의 어머니이시다.


그런데 어렸을 적 몹시도 추운 겨울날 어머니 손잡고 시골 교회를 처음으로 출석한 날부터 교회도 나의 어머니가 됐다. 교회를 안 좋게 얘기하는 친구하곤 사력을 다해 싸웠다. 교회를 욕하면 내 어머니를 모함하는 것처럼 들렸다. 요즘도 몸된 교회에 돌을 던지면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아프다. 그리고 더 가슴 아픈 것은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세상에 동조해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왜 믿지 않는 자들의 가치로 교회를 폄하해야만 하는가?


한 번은 입학금 문제로 크게 싸우시는 걸 목격했다. 어머니는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아들아! 집안에서 일어난 일은 밖에 나가 말하는게 아니란다.” 나는 그때부터 집안에서 일어난 어떤 일도 밖에 나가 얘기한 적이 없다. 부끄럽고 창피한 일은 스스로 노력하거나 기도로 해결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식장에서 알베르토 까뮈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지만 정의가 나의 어머니에게 총부리를 겨눈다면 나는 그 정의와 맞서 싸우겠다.” 까뮈가 어머니의 심장에 총구를 겨누는 자와 싸울 것이라고 한 말이 나에게는 추상같은 주님의 음성으로 들린다. 그는 생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키푸리아누스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로 모셔야한다.”고 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3:20)


병든 어머니일지라도 우리는 그 어머니를 버릴 수 없다. 아픈 어머니의 병든 부분이 위중하다면 치료를 위해 노력하고 밤을 새워 기도해야 할 것이다. 현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어려운 교회의 일들을 보며 비난하는 사람은 많으나 기도하는 사람은 적은 것 같아 참 마음이 아프다. 내가 남을 향해 손가락질 할 때 한 손가락이 앞을 향하지만 남은 네 손가락은 나를 향한다. 두 눈 부릅뜨고 상대방을 감시하는 눈은 많으나 두 눈 딱 감고 무릎 끓는 사람은 적다.


프랭크린의 어릴 때 일로 중학교 시절 읽은 인생처세술 책으로 기억된다. 그가 가난한 부모 밑에서 용돈을 타자 기쁨에 넘쳐 길거리로 뛰어나갔다. 한 어린이가 피리를 불면서 뛰노는 것을 보자 그는 장난감 가게로 달려가 가격을 묻지 않고 갖고 간 용돈을 다 주고 피리를 샀다. 신이 나서 피리를 불고 뛰놀 때 형이 피리 값을 묻는 바람에 비로소 네 배나 더 주고 산 것을 알게 됐다.


그가 형들에게 풀이 죽어 놀림 받고 있을 때, 이것을 안 부모는 “사람이란 탐나는 물건이 있으면 그 진가보다 더 비싸게 사는 일이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부모의 가르침은 그에게 큰 교훈이 됐다. 그는 빚을 지면서 옷치장만하는 사람을 보면 또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기 관리를 했다. ‘저 사람도 옷의 가치를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있구나 피리를 비싸게 삿구먼!’ 그는 세상살이에도 항상 관찰하며 타이르는데 게을리지 않았는데, 지나고 보니 나에게도 한평생 자기관리에 도움이 됐다.


대학교 2학년 때 김철수 철학교수는 나에게 어거스틴(Augustinus)의 ‘생애와 사상’이란 제목으로 리포트를 쓰게 해 수업시간에 발표하게 했는데, 16세에 가출해 방탕아가 되어버린 아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해 드디어 모니카 어머니가 죽은 후 6개월 후에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온 어거스틴은 3년간 눈물로 회개하면서 쓴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세계적인 걸작품이 되었고 어거스틴은 중세 천년의 가장 위대한 성자요 기독교 역사의 위인이 됐다.


나는 어머니 못지않게 87세에 소천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삼일간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할 때에” 찬송을 부르는 중 하늘을 우러러 희열에 가득차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본인도 입으로 찬송을 부르며 임종을 맞았다. 어려서부터 엄한 훈도로 매를 들었고, 장자인 나를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징계를 아끼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흔적이라면 아버지는 엄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림자였다.
아르메니아 대지진 때의 이야기이다.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져 내려 28세의 수잔나 페트로시안(Susana Petrosian)과 네 살 된 딸 가야니가 건물 벽 속에 갇혔다. 모녀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의 공포뿐이었고 아이는 갈증과 굶주림에 지쳐 울부짖었다.


그때 어머니 수잔나는 유리조작으로 손가락을 찔러 딸에게 자신의 피를 먹였다. 어머니는 딸이 보챌 때마다 차례차례 손가락을 베어 아기의 입에 물렸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 모녀가 매몰된 지 14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됐다. 그런데 어머니 수잔나의 손가락 10개는 모두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십자가상에서 양손과 양발 그리고 머리에 쓰신 가시면류관에 찔려 이마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가 골고다 언덕을 적시고, 오늘날 온 인류의 죄악을 씻기고, 그 피를 성찬에서 마셔 우리가 살아나는 새 생명의 기적의 주님께 영원한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어려운 농촌목회와 바쁜 도시 목회를 하느라 부모에게 효도를 잘못한 것이 이 날과 명절을 맞을 때마다 회오가 떠오른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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