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주님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주님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주님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주님의 쉴 곳 없네.”
최근 교회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성도들과 함께 불렀던 이 노래가 여전히 내 마음과 입술에 맴돈다. 왜일까? 이 노래만 읊조리면 높았던 마음도 금세 낮아지고, 욕심 가득찬 마음도 왜 텅 비어지는 것 같을까? 아무래도 이 노래에 무슨 마력이 있는 듯하다.
하덕규 집사가 지었다는 이 노랫말은 무엇보다 지금의 내 마음을 정확히 집어낸다. 노랫말 하나에 여지없이 내 마음을 들킨다. 정말이지 난,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실 자리마저 뺏을 만큼.
알량한 자존심과 고집과 교만이 목회자 마음에 먼저 채워져야 할 풍성한 주의 은혜를 다 밀어낸다. 심지어 주일 아침조차도 오늘 우리 공동체에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기대하기보다, 몇 명의 성도가 이번 주일엔 나왔는지, 얼마의 헌금이 들어왔는가에 더 관심이 가는 못난 목회자이다. 그러니 목회자의 마음에조차 주님이 온전히 거하질 못하신다.
이는 비단 주님에게만이 아니다. 함께 사는 내 아내, 함께 일하는 교역자, 함께 주를 섬기는 성도들에게도 그러하다. 그들이 내게와 쉬지 못한다. 긴장과 부담만 준다. 날카로운 내 안의 가시가 그들을 여지없이 찌른다. 그럴 자격도 없는데 말이다.
성경 사사기 우화가 생각난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왕이 될 욕심으로 경쟁자 70여명의 형제들을 무참히 살해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담이 그런 못된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우려는 세겜 사람들을 향해 들려준 우화이다.
어느 날 나무들이 감람나무를 찾아갔단다. “우리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하지만 감람나무는 “나의 기름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얼마나 영화롭게 하는데 내가 이 귀한 일을 버리고 왕이 되겠느냐”며 그 자리를 거절했단다. 그러자 나무들은 무화과나무도 찾는다. 하지만 무화과나무 역시도 “나의 단것과 아름다운 열매가 있는데 어찌 그 귀한 것을 버리고 왕이 되겠느냐”며 거절한다.
그러자 포도나무도 찾는다. 하지만 그 역시도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이 귀한 일을 두고 어찌 왕이 되겠느냐”며 거절한다.
그래서 나무들은 가시나무를 마지막으로 찾는다. 그런데 그 가시나무는 달랐다. “당연히 내가 왕이 되어야 한다”며, “내가 왕 되는 것을 거절하는 자까지 가만 안두겠다”고 말한다.
결국 그래서 그 가시나무 같은 아비멜렉이 왕이 된다. 그러니 어찌 그 나라가 평안할까? 뭘 제대로 정치할까?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며 상처만 남긴다. 그래서 나라도 그도 다 망한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욕심을 비우고 오로지 자신의 숭고한 사명에만 만족하는데, 가시나무는 자기 주제도 모르고 야망을 버리지 못한 결과이다.
내 속에 내가 많으면 당장의 욕심은 채울 수 있어도 결국 그것이 내게 복이 되지는 못한다. 주님도 오시지 못한다.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름지기 목회자는 나를 비워야 한다. 싹 비워야 한다. 내 속엔 내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 좋으신 주님이 내 안에 풍성히 머무신다. 그게 목회다.
김종훈 목사 / 오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