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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해도 될까?

심연희 사모
RTP지구촌교회(미주)
Life Plus Family Center
공동대표

목회자에게, 교회 중직들에게, 혹은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라고 한다면 No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그 필요를 다 내가 채워줘야 할 것 같은 선한 마음에서이다. 또 부탁하는 것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난감하다.
내가 힘에 부쳐도 상대방이 원한다면 어떻게 하든 들어줘야만 할 것 같다. 내가 교회에서 지도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고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 하고, 기독교인이라 더욱이 착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요구에 응답하다가 점점 더 상대방이 부담스럽고 심지어 미워진다는 데 있다. 내 할 일을 못하고 손해를 보면서까지 애를 썼는데 상대는 끝도 없이 요구하는 것만 같다. 어느새 내가 해주는 일들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만 같다. 힘이 들어 어쩌다 No라고 할라치면 상대방은 섭섭해하는 것 같다. 그게 마음이 영 불편하고 내가 이기적인 것 같아 죄책감까지 든다.


그래서 계속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어느 새인가 상대방에게 분노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 내가 도와줘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그 사람이 화나고 짜증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와주고픈 선한 마음이 상대에 대한 노여움으로 바뀌기도 한다. 사역이 더 이상 기쁘지가 않고 버거운 일이 된다. 착한 마음이 시작이었는데 이상하게 죄책감과 분노가 결과물이 된다. 정해진 시간을 자꾸만 넘어가 길어지는 소그룹 모임이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효과적인 대인관계를 위한 조언들을 살펴보면 No라고 말하는 법을 가르친다. 경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No 하면 미움받아서 대인관계가 나빠질 것만 같은데 오히려 건강한 대인관계의 방법이라고 역설한다.
하나 됨을 강조하고 개인보다는 그룹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경계라는 개념은 상당히 이기적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다. 가족이 가진 성이 개인의 이름보다 앞에 나오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나를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부모는 그렇게 자녀를 위해서 희생하고 자녀는 또 그 부모를 돌봐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경계선은 모호하고, 가까워진다는 의미는 이 경계선이 없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부부는 하나이어야 하는데, 이런 경계선은 하나 됨을 파괴하는 개인주의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또한 많은 교회들에서 목회자의 가정은 그 경계가 모호할 수밖에 없다. 온 가족이 사역에 뛰어드는 상황에서 직장과 가정의 경계가 분명할 수도 없고 분명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적인 상황과 정서를 고려할 때 경계에 대한 강조는 불편한 일이다. 끝나는 시간이 분명한 목장 모임은 왠지 야박하다. 오전에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느라 심방을 꺼리는 목회자도 왠지 정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건강한 균형에 있다. ‘No!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원제 Boundaries’ 이라는 책에서 헨리 클라우드 박사는 건강한 경계의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경계는 우리를 규정한다…. 경계는 내가 멈추고 다른 사람이 시작해야 할 부분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소유권에 대한 인식을 갖도록 이끌어 준다”라고 말한다. 서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어디인지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 경계가 허물어진 극단적인 사례는 성폭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물리적 폭력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만의 가장 개인적이고 고유한 영역을 짓밟고 침범한 것이다. 또한 우리는 경계를 통해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버리도록 도와준다. 진주는 안쪽에, 돼지는 바깥쪽에 있도록 분류한다”(마 7:6) 지속적이고 심한 학대를 받았던 사람들은 건강한 경계를 지키는데 어려움을 가진다. 오히려 나쁜 것을 선택하고 좋은 것은 내버린다.


가정폭력으로 잡혀가 TV에서 인터뷰를 했던 어떤 사람이 생각난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끊임없이 때리면서 말했단다. 널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자신이 겪은 학대를 통해 사랑하면 때려야 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때렸던 것이다. 고통과 사랑을 동일시한 것이다.
내게 무엇인가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No라고 해도 될까? 사랑없는 사람으로 비추어지면 어떻게 하나? 나를 미워하면 어쩌나?


그러나 Yes와 No의 건강한 균형을 알지 못하면 나쁜 것을 거절하는 용기도 알지 못한다. 내게 나쁜 것, 혹은 지나친 요구에 No 하는 것은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하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아는 사람이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 내게 나쁜 제안들을 당당히 쳐낼 수 있다.


요구를 거절할 때 상대방이 자신을 떠날까 봐 두려운 사람은 No하지 못한다. 친구들이 마약을 건넬 때, 그 무리에서 따돌림 받을까 봐 두려운 아이는 감히 No하지 못한다. 잠자리를 안 해주면 남자 친구가 떠날까 봐 두려운 자매는 No하지 못한다. 남자 친구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으면, 그가 나의 경계를 침범해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나 착하고 좋은 목회자로만 남기를 바라면 No 할 수 없다.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이 최우선인 사람은 No 할 수 없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상대의 아픔에 주목했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어 보살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아무 대가 없이 재정적 손실을 감당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잊어버리는 사실이 있다. 이 선했던 사마리아인도 자기 일을 보기 위해 떠났다(눅 10:35). 강도 만난 자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일을 다 내팽개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균형감이 필요하다. 건강한 경계는 너무 지치지 않고 더 길게 사역할 수 있는 전략이다. No 하는 것도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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