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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 기독론 : 요한의 기독론

요한의 ‘독생자’ 기독론(2)

김광수 명예교수
전 침신대 신학과

요한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아들” 칭호가 처음 사용된 것은 침례자 요한의 사역을 다룬 기사에서 침례자 요한 자신의 언급으로 제시된다(요 1:34). 요한복음서는 침례자 요한의 사역이 가장 많이 다뤄진 복음서라는 특징을 갖고 있기도 하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부터 침례자 요한을 다룸으로써(요 1:5~8, 15), 침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긴밀한 관계성을 부각시킨다. 요한은 서두를 마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묘사를 시작하면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침례자 요한의 증언을 두 단락으로 제시한다.


첫째 단락에서(요 1:19~28)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침례자 요한의 증언은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소리이며(요 1:23) 또한 그의 침례 사역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한 사역이라는 것으로 제시된다(요 1:26).
둘째 단락에서(요 1:29~34)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증언은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며(요 1:29) 또한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요 1:34). 세상 죄를 지고 가신 대속 제물로써의 하나님의 어린양과 성령으로 침례를 베풀어주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의 중심적 국면을 나타낸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근원적이며 근본적 문제인 죄 문제를 해결하셨으며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에 복귀하시고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그 분의 공생애를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을 온 인류에게 선물로 나눠주시는 부활과 생명이신 존재를 나타낸다. 이렇게 구원의 주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의 중심적 국면을 침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 제시한 것도 요한복음서의 특징 중 하나다.


둘째 단락의 증언에서 침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해 자기 자신도 몰랐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의 존재를 알려주시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했다는 것을 부각시키다. 먼저 침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제시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 하나님의 어린 양 개념은 분명히 구약적 배경을 갖고 있다: 유월절 어린양(출 12장);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어린 양(사 53:7); 속죄일의 어린 양(레위 16:21f.). 요한이 어느 것을 의중에 두었는지 분명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유월절 어린양에 관한 성경의 성취를 언급한 것을 보면 저자의 일차적 관심은 유월절 어린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9:33, 36). 그러나 저자가 유월절 어린양에 관한 유대교의 교훈을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는 유월절에 희생당하는 어린양이 죄를 가져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의 사상적 배경은 최후의 만찬과 주의 만찬 의식을 유월절 식사의 측면에서 보려는 해석이다. 주의 만찬 의식은 유월절 식사로 이해되었으며 또 그 안에서 죄사함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묘사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침례자 요한의 증언이 예수의 존재와 관련하여 계속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30). 그는 그가 이전에 말했던 분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말은 저자가 이미 서두에서 사용한 침례요한의 말과 정확하게 동일하다(1:15).


침례요한은 자기의 사역의 기간이 끝나가고 있으며 자기가 예고하던 분의 사역이 시작됨을 인식하면서 그 분의 위치를 자기보다 앞세운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 편에서 자기와 그 분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전망한다(3:30). 침례자 요한은 그의 침례 사역의 목적을 말한다:“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1:31). “나도 그를 알지 못했다”라고 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가 있기 전까지는 예수께서 “그 오실 자”(마 11:3; 눅 7:19)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의 침례 사역의 목적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 곧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활동의 실행자인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려는 것이었다. ‘나타내다’는 동사는 저자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키기 위하여 즐겨 사용한 단어다(1:31; 2:11; 3:21; 7:4; 9:3; 17:6; 21:1, 14).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은 4번 나오는데, “그 유대인들”과 같은 부정적 의미를 가진 대상은 아니다. 그가 침례를 준 사역은 그 자체로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필요한 사역이었다. 마가가 그의 침례 사역을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로 규정한 것과 달리(막 1:4), 요한복음서 저자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며 하나님의 생명(성령)을 수여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침례자 요한의 증거가 계속된다: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1:32). 그가 증언하는 내용이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침례 사건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막 1:10; 마 3:16; 눅 3:22), 저자는 예수의 침례 전승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예수께서 침례를 받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마가복음에서는 성령의 강림을 예수님 자신이 목격한 것으로 나오는데(막 1:10), 여기서는 침례요한이 본 것으로 제시된다.


저자는 성령 강림 사건을 객관적 증인이 없이 단지 개인적 경험의 이야기로 간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 자신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다만 침례요한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존재를 알게 하려는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처음부터 그 자신의 존재를 알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머물렀다’는 단어는 본래 ‘거하다’는 의미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의 연합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됐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의 관계를 가르치는 고별 강화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15:4)는 말씀에서 표현되듯이, 거한다는 것은 상호 연합의 친밀하고 직접적 관계를 가리킨다. 또 이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 표현되어 성령이 예수님 위에 영원히 거주하게 된 것을 나타낸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는 성령의 주관하심을 따라 이루어지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침례자 요한은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1:33~34). 그는 “나도 그를 알지 못했다”라는 말을 반복 사용함으로써(1:31, 33), 그가 예수님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한 것임을 강조한다.


누구 위에 머문다는 말은 한글 성경 요한복음의 다른 부분에서 ‘거하다’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요한복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단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한 연합의 관계, 아들과 신자들의 영원한 연합의 관계,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신자들의 연합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성령이 내려와서 머무는 그 사람은 이제 성령과 온전히 연합된 존재로서 성령의 보유자이며 또한 성령을 수여하시는 분이다(3:5, 34; 7:38~39; 20:22).


요한복음에서 성령으로 침례를 준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완전한 변화를 가리킨다. 그 변화는 어둠에서 빛으로,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멸망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누리고 거룩한 열매를 맺는 삶으로의 변화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은 모두 성령을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인 은혜의 결과다.


구약의 예언 전승에서 성령이 임한 사람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활동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으로 묘사된다(사 61:1). 따라서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은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준비해 오신 새로운 구원을 감당할 자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이다. 침례자 요한이 말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권위를 위임받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사역의 실행자를 가리킨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에서 “하나님의 아들” 대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로 기록한 사본들이 존재한다. 요한은 침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 공관복음서에서 익숙하게 사용된 것으로써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을 위해 택함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그리스도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을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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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