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앞에는 늘 해마다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무슨 새인지는 모르지만 때가 되면 현관문 앞 베란다 구석에 늘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현관 앞에 떨어지는 지푸라기와 새똥을 치우기 귀찮기는 하지만 매해 그 구석진 자리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새가 신기하고 반갑다. 우리 집에 나도 모르는 사이 매일 왔다가 가는 손님도 있다.
우편배달부이다. 우편함을 저녁때마다 열고 돈 내라는 고지서와 광고지들을 꺼내 뒤지면서도, 나는 혹시 반가운 소식이 없나 기대한다. 요즘처럼 전자메일과 텍스트가 주요 의사소통이 된 시대에도 이메일을 열 때면 문득 생각한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없을까? 뭔지는 모르지만 기쁜 소식이 없을까? 반가운 사람에게 혹 연락이 있을까?
사람들은 연인이 보낸 사랑의 메시지, 가족들의 귀가 시간, 반가운 친구가 밥 먹자는 전화, 직장에 합격했다는 소식, 월급 올랐다는 소식, 상사가 칭찬한다는 소식 등 기분 좋은 연락들을 기다린다. 멀리 대학을 갔던 자식이 돌아오는 명절을 기다린다.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새 얼굴을 기다린다.
좋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좋은 소식을 기다린다. 그 소식들은 지루하고 우울하게 느껴지는 하루에 드리워진 회색빛을 무지개색으로 바꾸기도 한다. 때때로 우울하고 불안하고 화나고 지치고 힘들어하는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의 한마디, 좋은 소식 한 자락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누군가의 관심 있는 눈빛, 이해한다는 한마디, 함께 나누는 따뜻한 커피만으로도 진 빠졌던 하루에 더없는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짧지만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소식은 치유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핵심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 계절,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진 소식, 별것 아닌 것처럼 넘어가는 소식,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소식이 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귀한 친구, 구원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가져오신 아기 예수라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어느 날 상담소를 찾은 한 여성의 팔다리는 온통 문신투성이였다. 동네에서 문신을 해주는 가게 주인이란다. 주말에는 아르바이트 겸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려고 술집에서 칵테일을 만들며 일했다. 활달하고 씩씩해 보이는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이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자신의 문신에는 아버지 얼굴도 있고 어머니의 이름도 있었다. 남자 친구가 남겨 놓은 문신도 있고 어떤 특별한 순간을 기억하려고 새긴 그림들도 있다. 어릴 때 입양이 되어 자란 그녀가 십대가 됐을 때 양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녀가 기억하는 십대는 어머니의 간호가 다였다. 귀찮았고, 힘들었고, 화나고, 슬펐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충격적으로 경험한 그녀는 20대 후반에 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극도의 두려움에 빠졌다. 이제 정말 혼자 남은 것이다. 버려진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여준 그 가족들도 그녀를 하나하나 떠나갔다. 아무리 애써도 막을 수 없었다. 떠나간 사람들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 미친 듯이 남자 친구를 찾았고, 두세 달이 멀다하고 애인이 바뀌었다. 그런데 그들을 곁에 잡아 두려고 하면 할수록 더 진저리를 치며 하나하나 떠나갔다. 그들을 좇을수록 더 멀어져 갔다. 사람들이 떠날까 봐 그녀는 미리 그들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 곁에 있었던 사람들의 흔적이라도, 기억이라도 남기기 위해 몸에 문신을 새겼다.
그리고 그 허전함을 채워줄 누군가를 또 찾아 나섰다.
떠나간 사람들로 인해 상실감으로 몸부림치던 그녀에게 어느 날 누군가가 찾아왔다. 그녀가 기를 쓰고 좇아가지 않았는데 찾아온 손님이었다. 크리스마스 때에 오랜만에 만난 한 친구가 마음 둘 곳 없던 그녀를 자신의 교회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희한한 소식을 하나 들었다. 아기 예수가 외로움과 고통으로 찌든 세상으로 찾아오셨다는 소식이었다. 30여 년 동안 그녀의 귓가를 그저 스쳐만 지나가던 평범한 크리스마스 타령이었다. 그런데 곁에 남은 이 하나 없이 너무나 처절히 외롭던 올해에 믿을 수 없이 벅찬 소식으로 예수님이 그녀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그녀를 목숨보다 사랑한다는 고백과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는 약속과 함께… 그녀는 말한다. 더 이상 자신에게 문신을 할 이유가 없어졌노라고. 자신을 사랑해서 찾아오시고 절대로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예수님이면 충분하다고. 영원하신 하나님이면 충분하노라고. 이후에 그녀의 가게는 이 기쁜소식을 나르기 위한 아지트로 쓰였다. 그녀는 자신의 가게를 열고 소그룹을 인도했다. 문신하러 오는 손님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 주 안에서 그녀에게 가족이 생겼다. 형제와 자매가 생겼다. 이 땅에서 뿐이 아니라 천국에서까지 만날 가족들이었다.
그녀가 평생을 기다리던 기쁜 소식은 복음이면 충분했다.
우리의 아픔이나 상처는 상담자의 격려나 심리학 이론으로 많이 나아질 수도 있다. 친구의 위로로 반짝기운 날 수 있다. 그러나 잠깐 있다 사라질 누군가가 제공한 일시적 붕대나 반창고 일지 모른다. 상처를 치유하기 전 닦아내는 소독약 정도일지 모른다. 그 상처의 근본에서부터 새살이 돋게 하는 힘은 단 한 군데서 온다. 궁극적인 답은 복음뿐이다. 예수님뿐이다.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셔서, 여기까지 찾아오시고 함께 하신다는 그 사랑의 메시지뿐이다. 이 계절의 진짜 이유인 그 소식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