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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인교육의 관점에서 본 평신도신학-2

이석철 교수
침신대 기독교교육학과

크래머(Kraemer)는 이런 역사적 변질이 성경적 교회의 본질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교회사의 경향”이 ‘제도적인 교회’ 쪽으로 더 치우쳐 흘러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역사적 힘의 압력” 즉 사회적 및 정치적 압력과 교회 안팎의 위험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강력하고 효과적인 지도력과 권위가 요청됐던” 상황이 빚어낸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이다. 아무튼 교회가 “성서적인 형태에 가까이 가기보다는 교리와 권위의 단체로 발전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2. 종교개혁으로 인한 회복의 시작
12세기 이후에는 여러 종파가 중세교회의 교권주의에 대한 도전과 반발을 거세게 했다. 14세기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저항 운동이 그 중 하나이다. 그는 성직자든 평신도든 하나님 앞에서는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성경에 근거해 올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려 했던 이 운동들은 마침내 16세기에 종교개혁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평신도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은준관은 이에 대해, 교권주의와 반교권주의적 평신도 지상주의라는 양극단의 틈바구니에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교회론과 만인제사장 사상을 통해서 성경적인 평신도신학이 새롭게 시도된 것이라고 보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론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적 구별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권력화한 교회와 기득권층에 반기를 든 혁명적 사상이었다. “신학적 논의에 관한 한, 교회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도 또 위대한 사역론이며, 동시에 평신도론”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래머의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만인제사장론은 실제적인 열매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하나의 “원리 선언”으로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랫동안 영적인 미숙 상태에 있던 평신도들이 하루아침에 성숙한 신앙인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설교를 통한 성경교육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은 그 일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주체로 평신도가 아닌 전문 성직자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계급적 차별 철폐가 원리적으로는 주장됐지만, 현실적으로는 “일종의 ‘성직자’를 다시 구성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은 당시 정치, 경제적 기득권 세력인 영주들과 국가의 도움을 받으며 이뤄졌기 때문에 기존의 체제를 가능한 한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개혁은 일반 서민들과 평신도들의 위상을 높이는 데는 실제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고 발발한 것이 독일 농민전쟁이나 아나뱁티스트 운동이었다.


특히 신앙과 교회의 문제와 관련해 일어났던 것을 가리켜 ‘종교개혁 좌파운동’ 또는 ‘급진적 종교개혁운동’이라고 한다. 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운동들의 주요 특징은 신자들의 공동체가 곧 교회라는 성경적 신념을 가지고 평신도가 주도하는 교회를 지향하는 반교권적 “평신도 회복운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비가톨릭 진영은 국가교회의 형태로 “또 다른 성직주의”로 나간 주류 개신교회(루터교,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와 평신도 중심의 종파들로 나뉘는 분열의 불씨를 남겼다.


3. 20세기의 평신도신학 정립
성경적 평신도신학 정립의 역사적인 과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평신도의 역할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유럽의 신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행됐다. 가톨릭 신학자인 이브 콩가르(Yves Congar)와 네덜란드 출신으로 개신교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구자였던 크래머가 거의 동시에 평신도신학의 기념비적인 저술들을 출간한 것이다. 먼저 평신도신학에 대한 관심의 물꼬를 튼 것은 1957년에 출간된 콩가르의 “교회에 있는 평신도들: 평신도 신학에 관한 연구”(Lay People in the Church: A Study for a Theology of the Laity)였다.


이 책은 가톨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동등한 존엄성을 선포하고 ‘평신도 사도직’ 개념을 표방하게 되었다. 이 획기적인 변화의 결과로 수 세기 동안 가톨릭 평신도에게 억제됐던 성경읽기가 허용됐다. 홍병룡은 이러한 변화를 ‘평신도 시대’의 개막으로 평가했는데, 실로 그 이후 가톨릭 진영에서는 평신도신학과 관련한 많은 활동과 저술들이 있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평신도를 교회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생각하며 평신도의 위치에 대하여 가장 활기 있는 표현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크래머는 이에 대해 말하기를, 가장 ‘성직자적’이고, 교회를 주로 성례전을 베푸는 조직체로 여기는 가톨릭교회로서는 이런 변화가 “이상하게 보이는 일”이고 “실로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개신교 진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세계교회협의회(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됐던 평신도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그 이전 400년 동안 교회가 무관심했던 평신도 문제에 관한 관심을 새롭게 불러일으키는 데 공헌했으며, 평신도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활성화하여 비로소 ‘평신도신학’이라는 것을 공식화하는 데까지 영향을 주었다.


WCC의 평신도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크래머는 평신도신학의 고전이 된 “평신도 신학과 교회갱신”(A Theology of the Laity)을 1958년에 출간하게 된다. 이 기념비적인 저술은 이후 많은 평신도 관련 저술과 활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서구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평신도신학과 운동은 제3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는 제 3세계에서의 한 사례로 공동체에서의 성인학습을 통해 의식을 개혁하고 변화를 시도하는 모델을 소개하는데, 그중 하나는 브라질의 성인교육가인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교육이념과 방법을 활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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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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