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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음악으로 풀어보는 성경이야기(267)

다윗의 찬양론(2)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사무엘하6:21~22)

 

찬양자를 비난하는 미갈을 향해 다윗이 당당하게 반론을 폈던 이 선포적 예언 속에서, 두 번째로, 진정한 찬양과 경배의 핵심은 기억과 감사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찬양은 찬양의 대상을 높이며 자랑하며 인정하는 것이다. 경배는 높이며 자랑하며 인정하는 대상에게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다. 찬양의 본질인 높이며 자랑하며 인정하는 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칭송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칭송은 공개적인 것이 원칙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까지 감안한다면 비공개적인 것도 가능하다.

 

무엇을 칭송하는가? 간단하게 말한다면 찬양받으실 분의 역사와 능력과 속성이다. 찬양받으실 분의 역사와 능력과 속성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들음과 체험이다. 들음은 로마서10:17에 기록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하신 것과 같이 주님에 관한 기록인 성경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체험은 개인적으로 만났던 주님의 역사이다

 

찬양의 대상이신 주님을 찬양하려면 들음과 체험으로 축적된 지식을 다시 상기시켜야 한다. 축적된 지식의 창고에서 칭송할 내용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칭송할 내용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기억이라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 기억이라는 문이 고장나거나 닫히면 칭송할 내용을 상기하지 못한다. 칭송할 내용이 상기되지 않으면 찬양은 불가능하다. 기억의 문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찬양과 경배는 가능해진다

 

기억의 문이 고장나는 현상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건망증이고, 다른 하나는 치매다. 건망증이나 치매 모두 외형적으로는 비슷한 증상으로 나타나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증상이다.

 

원싱턴 포스트에 실린 건망증과 치매의 간단한 구별법을 참고해 보자. 첫번째로, 만약 내 키가 어디갔지?’ 하며 열쇠를 찾으면 건망증이고, 늘 보던 열쇠를 보고 이 열쇠는 어디에 쓰는 거지?’ 하는 의문을 가지면 치매. 두 번째로, 자주 다니던 가게임에도 그 가게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지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면 건망증, ‘가만있자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거야라고 자문할 때는 치매.

 

세 번째로, 가끔 만나던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을 때는 건망증,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이름을 잊어버렸을 때는 치매. 네 번째로, 낯선 장소로 운전하다 길을 잃어버리면 건망증, 자기가 살던 동네를 찾아가다 길을 잃어버리면 치매. 다섯 번째로, ‘내가 기억력을 점차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건망증, 기억력이 감퇴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를 때는 치매. 기억은 찬양받으실 분에 대한 칭송의 내용을 상기시키는 과정이므로 찬양과 경배의 핵심을 이룬다.

그러나 찬양의 본질로서의 기억을 논할 때 치매는 해당되지 않는다. 치매는 뇌세포가 사멸하는 질병이므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이 없다. 치매로 인해서 찬양하지 못한다 해도 본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건망증도 본인의 의지에 반한다는 점에서는 치매와 비슷하지만, 적당한 자극을 주면 다시 기억이 회복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영적 건망증은 받은 은혜를 기억할 수 있음에도, 그 기억을 돕는 자극이 있음에도 자의적으로 기억을 회피하거나 무시하는 증상이다. 원한은 바위에 새기고 은혜는 강물위에 새기는 부류들에게 나타난다. 아홉 문둥이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심각한 건망증이다. 미갈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했다. 억울하고 불행한 일들만 기억했지, 일국의 공주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누렸던 부귀영화의 은혜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니 매사 부정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찬양이나 경배의 여지가 없는,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무감각한 삶이었다.

 

반면에 다윗은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그는 기회만 있으면 이 기억을 근거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했다. 이것이 바로 찬양이며, 경배이다.

 

노주하 목사 / 대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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