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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충성하라

한명국 목사의 회상록

한명국 목사
예사랑교회

“최재선 전도사, 지난 주일 나는 느티나무 밑 숲길로 도안교회에 오르다가 독뱀에게 물려 뱀독으로 오른쪽 발이 너무 퉁퉁 부어 올라 걷기가 힘드니 내 대신 가서 수요일 예배를 인도해 주시요!”라고 했더니 당시 나도 사례 없이 봉사하므로 다른 신학생들은 몇 사람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최 전도사는 계룡버스로 유성에 가서 걸어서 십리길로 도안교회에 잘 다녀와서 나는 고마움을 기억해왔는데, 1971년 9월 초에 부산 남문교회 개척 목회시 최 전도사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모님을 수소문해 선교사 우기수 침례병원 원장에 잘 부탁하여 취직시켜준 일이 이었다. 당시를 생각하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묵히 농어촌 개척교회를 충성하여 섬기다 천국간 최 목사와 홀사모의 얼굴이 떠오른다.


얼마 전 가평 필그림 하우스에서 교단원로목사부부 초청위로회에 3년 만에 하룻저녁 참석하니 1년 동안 소천하신 7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려운 시절 한평생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다 천국에 입성한 선배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날 앞을 못 보기에 인도를 받는 목사, 휠체어를 탄 목사, 걸음걸이가 매우 시원찮은 분, 말을 잘 못하거나 귀가 잘 안 들리는 분, 기타 병자와 독거노인 등등 나도 언젠가 가야할 모습이라 생각해 보니 인생은 부운몽이요 생로병사로구나!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1:24~25)


지홍준 목사 입관예배 설교를 하고 돌아오면서 1965년 3월 고인이 신학교 별과에 입학한 때의 일이 기억이 떠올랐다. 김인봉 전도사님이 개척한 도안교회에 안병걸 전도사 1년, 그 후 최한원 전도사 1년 후에 4대 교역자로 정과 신학생으로 입학하면서 주일과 수요저녁 기도회 인도하고 사례비로 가끔 박금순 집사가 준 계란을 손수건에 싸서 갖고 와 기숙사 밥에 비벼서 먹었는데, 이것이 지홍준 신입생 눈에 띄었다.


“계란은 두 사람만 비벼먹고 우리는 안주냐!”라는 성깔있는 소리를 듣고 “할머니 교인이 두 개 밖에 알줘서 동방인(최한원)과 나눠 먹었는데 다음엔 자네에게도 함께 나눠 먹도록 하지”라고 대답했던 55년전 그의 얼굴과 그날 쓸쓸히 입관예배를 지켜보던 한두순 사모의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침례교아시아태평양협의회(APBF)에 10년간 봉사하며 부회장이 됐고, 이어서 5년간 회장직을 맡게 될 순서였다. 마침 침례교세계연맹(BWA) 상임위원회를 한국에 유치해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빌려 김장환 목사님이 준비위원장이 되시고 나는 실무총무로 봉사해 차기 APBF회장이 확실시됐다. 그런데 방글라데시의 G씨가 그때 나를 회장으로 모시겠다고 여러 상임위원 앞에서 말해놓고 그 후 방콕에서 열린 실행위원회에 나보다 하루 먼저 와서 정치 수완을 발휘해 회장이 됐으므로 조금 불쾌했으나 오히려 나는 BWA 부총재로 피택되어 그를 축하해주고 포용해 줬다. 그리고 4개월 후 그가 갑자기 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비애의 눈물을 흘렸다.


지난번 한국교회100주년기념사업회 이사회에서 35년 전 우리 각교단장들이 뜻을 모을 때 선두에 서신 한경직 목사님의 사진을 보며 고매한 생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2005년 BWA창립 100주년 연차 대회가 영국 버밍험에서 개회하는 날, 미국 대통령이 된 후도 꼭 성수주일하고 백악관 가까운 교회에 나가 교회학교 교사를 하셨다는 존경하는 지미 카터(Carter) 부부에게 단상에 올라가 우리 부부가 부총재 취임시 받은 꽃다발을 전하고 인사와 담소후 사진을 찍었는데 겸손하고 인자하신 그분이 지금도 살아계시는지?
        
오 세상이여!             
아 인생이여!             
아 시간이여! 
           
오 이제 마지막 발걸음에 올라  
옛날 섰던 자리보고 소스라치며
그대 청춘(prime)의 영광 언제 다시 오려나?
오 결코 이제는 다시 오지 않으리!


영국 시인 쉐리(Percy B. Sherry)는 30년을 살고 비탄(Lament)이란 이 시의 내용처럼 비명으로 갔다. 그녀의 초상화는 우아하고 고우며 정숙하고 지성미의 여인으로 낭만주의 기풍의 비탄의 시처럼 갔지만, 우리들 인생도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을 뒤돌아 볼 때마다 정말 세상살이는 왜 이렇게 변하고 인생도 초로인생이요 일장춘몽에 남가일몽으로 촌음시경 속에 나도 벌써 80을 넘어 예수님보다 50년을 더 살았으니 이제야 겨우 철이 조금 들려고 하는가?


80의 연수는 석가모니의 소위 열반의 입적수이지만 시내산의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은 연수요 민족구원의 명령을 받아 실행하여 애굽의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를 시작한 연수가 아니던가? 70의 은퇴, 75세의 은퇴, 산수인 80에 인생의 새로운 결단과 도전을 시도하는 것이 어떤지요? 죽도록 충성한 선지자들과 사도들 및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 죽도록 충성함이리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60여 년 전 대학교 영문학과에서 배운 미국시인 롱펠로(Longfellow)의 시가 황혼기의 나를 회춘의 웅비로 도전해와 맘속에 그윽이 떠오른다.


과거를 슬프게 뒤돌아보지 말고        
현재를 슬기롭게 살라                 
흘러간 과거는 다시 오지 않고        
현재 이 시간만이 그대의 것이다.      
계속 미래의 멋진 영상을 맞이하라!    

행동하라
세계의 넓은 내일을 위해 행동하라
세계의 넓은 들판에서
목매인 송아지처럼 울지만 말고
투쟁하는 용사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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