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행복한 직장, 행복한 사회를 꿈꾼다.
상담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어서 왔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우울감, 실패감, 불안감에서 벗어나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다는 것이다. 상담을 오기 전에 그들은 이미 행복하기 위한 시도들을 해왔다. 미친 듯이 일도 해보고,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이나 마약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일으키는 문제들이 싫어서 모든 사람들과 담을 쌓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오기도 한다. 이혼을 하고 현재의 관계를 끝내기도 한다. 그동안 겪었던 우울감을 없애버리기 위해 약도 먹는다. 문제를 없애고 행복을 추구하는 한 방법이다. 교회를 옮겨 오는 사람들도 옮겨 가는 사람들도 있던 교회의 고질적 문제에서 해방되고 싶어한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비로소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은퇴하신 목사님 사모님께서 드디어 힘겨웠던 목회에서 해방됐다고 너무나 기뻐하며 꽤 오랫동안 교회 근처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모습도 본 적이 있다.
한국 사람도 한국교회도 다 지긋지긋하다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내심 내게는 언제나 저런 날이 올까 부러운 적도 있다.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문제를 피하고 없애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행복하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들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문제를 없앤 진공의 공간을 다른 문제가 자연스럽게 채우는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에 드는 시간과 피곤함을 해결하기 위해 차를 산다. 숨 막히게 복닥대는 버스나 지하철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차를 유지하는 비용과 주차비, 더 길어진 이동시간 등, 다른 문제가 따라온다. 더욱이 걷는 시간이 줄면서 배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는 늘어나는 몸무게를 해결해야 한다. 운동을 시작하려고 헬스장에 등록한다. 배 나오는 문제를 해결하지만, 운동하는데 드는 비용과 시간, 그 귀찮음을 매일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그 공간을 채운다. 문제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는 기대는 허상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스러움을, 삶의 문제들을 자식에게까지 물려주지 않으려고 모든 부모들은 안간힘을 쓴다. 자신이 겪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밤낮을 구별하지 않고 미친 듯이 일을 한다.
장사하는 부모는 자식만은 장사를 시키고 싶지 않다. 그 불안함과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는 목회의 무게를 또 겪게 될까 봐 신학교 간다는 자식을 말리게 된다. 공부할 환경이 안됐던 부모는 자식만은 맘껏 공부시키고 싶다. 자녀가 자신처럼 세상에 치이고 상처받으며 살까 봐 대신 나서서 싸워준다. 내 자식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철통방어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애써 문제를 해결해준 진공의 공간에 행복만 들어차면 좋으련만, 의외의 다른 문제가 들어선다. 삶이 주는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는 약한 자녀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험할 기회를 뺏는다.
그렇다면 행복을 포기하고 살아야 할까? 행복하고자 한 선택들에 어차피 또 따라오는 문제들이 있으니 체념하고 살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문제는 행복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통스럽지만 유용하다. 문제가 없으면 아무도 고민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내게 삶이 주는 아픔이 없었다면 상담사역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목회가 주는 어려움이 없다면, 내 안에 끊임없이 올라오는 회의감과 갈등이 없다면 글을 쓰지도 못할 것이다.
삶의 문제들은 아프지만 행복으로 이어지게 하는 다리가 된다. 마크 맨슨(Mark Manson)은 “행복은 문제가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데서 온다”라고 주장한다. 행복은 가만히 있으면서 느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행동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문제를 피하려고 하거나 문제가 없는 것처럼 부인하려는 시도에서 우리는 더 고통받는다.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마주하기 시작하면서야 묘한 안도감을 얻는다. 마주하기 시작하면 해결책이 있다. 이것을 하나하나 고민하고 해결하면서 행복을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문제가 없기를 바라기보다는 좀 더 나은 문제가 있는 삶을 바라는 것이 행복을 경험하는 확률을 높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보다 못해 권면의 말을 건넨 목회자 때문에 시험에 들 때, 얼굴을 안 보면 그만이다. 기웃거릴만한 다른 교회도 널려있다. 그런데 나의 단점을 인정하고 마주하기 전에는 다른 환경으로 바꾸어봐야 그 밥에 그 나물이다. 내 약점을 후벼 파는 성도들의 비판은 당연히 아프다. 몇 날 며칠 배신감과 억울함에 잠이 안 온다. 그런데 내게 있을지도 모르는 부족함을 직면하기 전에는 그 공격에 계속 상처만 받는다. 부족함을 나 자신의 새로운 개발의 시작으로 삼을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 꽈리를 튼 누군가에 대한 미움은 그 사람의 잘못으로 돌리면 속은 좀 편하다. 내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거나 다 배우자 탓이라고 말하면 나는 비난으로부터 안전할 것처럼 보인다.
문제가 없는 것처럼 외면하고, 상대방이 문제인 것처럼 핑계 대면 덜 창피하다. 직면하지 않는 나의 문제는 일시적인 안도감을 줄지 모른다. 그러나 건강한 해결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고통은 생각보다 더 오래간다. 건강한 해결이 가져다주는 행복과 축복은 경험할 수 없다.
원고 마감을 외면하고 피하는 시간만큼 부담감을 경험한다. 돈 내라고 집에 날아온 고지서를 쌓아놓는 시간만큼 불안하다. 써내야 하는 숙제라는 괴로운 현실을 직면하고 도서관에 가서 앉기 전까지는 학교 과제를 끝내는 시원함을 경험할 수 없다. 우리들의 교회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건강한 교회로 탈바꿈하는 시작이 된다. 살면서 내린 어떤 결정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또 다른 실수를 막는다. 내게 이 나이 먹도록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야 그 약함을 주님께 내놓기 시작한다.
자신의 죄를 마주하기 시작해야 예수님의 구원을 경험한다. 자신의 깨어짐과 마주해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안다. 행복은 문제가 없을 때 피어나는 감정이 아니다.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해 가는 행동을 통해 경험하는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