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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심불구자(心不具者)가 아니었다

하늘붓 가는대로 -124

권혁봉 목사
한우리교회 원로

생전 처음 명동에 간 나는 양장점과 구두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를 외계인처럼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어떤 진열장에 걸려 있는 흰색 원피스를 가리키며 입어 보겠다고 했다. 마침 그 가게 앞에는 내가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높은 문턱이 있어서, 나는 그냥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문 밖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니, 아주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동생을 반겼다. 그런데 동생을 탈의실로 안내한 후 무심히 돌아서던 그녀가 문에 기대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고는 흠칫 놀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나중에 와요. 손님 있는 거 안 보여요?”
그제나 이제나 눈치 없기로 소문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이번에는 한 옥타브 더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중에 오라는 말 안 들려요? 지금은 동전이 없다구요!”
순간 그 소리를 들은 동생이 옷을 입다 말고 탈의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뭐라고 그랬어요, 지금. 우리 언니를 뭘로 보는 거냐구요!”


나는 그제야 주인 여자가 나를 가게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예요? 우리 언니는 박사예요, 박사. 일류 대학을 나오고, 글도 쓰고 책도 내는….”
길다란 흰색 원피스를 한쪽 어깨만 걸친 동생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분노의 여신 같았다. 어쨌거나 여름날의 그 경험은 나의 생활 패턴을 바꿔 놓았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바로 다음날부터 나는 청바지를 벗어 버리고 정장을 입었다. 옷을 선택할 때는 실용성보다는 문자 그대로 거지처럼 보이지 않는데 기준을 둔다. 로션 하나 안 바르던 얼굴에 화장도 한다. 학생들 말마따나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거지로 보일 확률을 줄이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렇게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것을 나는 사명으로 생각한다. 아니, 더 나아가 희생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어차피 목발을 두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므로, 순전히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학생들의 체면을 위해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의 명예를 생각해 그래도 동전 구걸하는 거지로는 보이지 말아야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피같이 아까운 시간 10분을 들여 열심히 분 바르고 립스틱을 칠한다.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대로 故장영희 교수는 중증신체장애자였다. 그런데 위의 자기표현을 보라. 명동에서 거지처럼 보였던 자기를 어쩌면 조금도 삭감 없이 그대로 말할 수 있을까? 어째서 그는 그렇게도 당당한가? 겉보기에는 심한 교통사고를 당한 승용차처럼 우그러지고 쭈그러진 그 육체를 가지고도 조금도 꿀리지 않고 담대할까. 내가 그의 수필을 보노라면 한 투명인간을 값없이 들여다보는 것 같아 어떤 때는 미안하다 싶을 때도 있었다.


폐일언하고 그 교수는 왜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자기를 갖고 있다가 떠났던가?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문학이나 예술하는 사람들이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도 괜한 짓이 아니라 속이 꽉 차 있기에 겉을 의식하지 않는 데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故장교수에게는 신체장애가 있을지언정 정신장애는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육불구자(肉不具者)였지 심불구자(心不具者)는 아니었다. 찌그러진 그 신체 구석구석에는 정신이 살아 있었다. 거기엔 혼(魂)이 맥동하고 있었다. 철학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그의 찌그러진 신체의 구석구석에 충만하기에 남이 보지 못하는 자기만의 풍만한 정상적인 육체를 본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문학세계와 가톨릭이란 종교가 몸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신자로서의 ‘겉과 속’은 어떠한가. 미사 참석 안 하면 괜히 께름칙하여 가능하면 주일 미사는 빼먹지 않고(그것도 서강대학교 이냐시오 성당의 그 많은 층계를 올라가며), 책상 위에는 항상 성경이 놓여 있고, 가방 속에는 묵주가, 차 안에는 작은 성모상이 있고, 가끔은 주보에 글을 쓰기도 하니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열렬한 신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걸핏하면 기도하다 잠들기 일쑤고(그래도 어머니는 기도하다 잠들면 나머지는 수호천사가 해 주니 한 하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고 위로하시지만), 성경을 읽으려고 손을 뻗치다 슬쩍 옆에 있는 소설책을 집어 들고,“ 위 같은 책 「겉과 속」 P.138


오늘날 신체는 멀쩡하면서도 마음이 불구인 자는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사람들은 신체불구자는 보면서도 마음의 불구자는 볼 줄 모른다. 한편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문학사상과 가톨릭사상이 그녀 속에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진정한 구원을 체험할 틈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이 그대로 적중한다면 그녀는 꼭 그렇게 행복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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