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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에 나타난 신학 산책

요한의 ‘인자’(사람의 아들) 기독론(1)

김광수 특임교수
침신대

지금까지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에 나타난 기독론적 내용을 살펴봤다.
이제는 “사람의 아들” 곧 ‘인자’ 칭호가 사용된 구절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에는 인자 칭호가 13회 나온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 제시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신성을 부각시키는 반면 사람의 아들은 인성을 부각시킨다.

인자는 영원한 신성의 존재성을 가진 로고스가 신체를 가진 인간의 존재가 되어(1:14) 공생애 삶을 사셨고 하나님의 뜻을 완결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와 활동을 전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번부터는 인자가 사용된 말씀들을 통해 요한의 인자 기독론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인자의 첫 번째 사용은 예수님의 공생애 준비과정에서 두 번째 제자 집단과의 만남 사건에서 나온다(1:51). 그 사건은 빌립을 만나시고 제자로 초청하신 후에, 빌립이 그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를 예수께 데려온 것으로 진행한다. 빌립의 전도를 듣고 자기에게 나온 나다나엘을 가리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1:47).


여기서 다시 사람의 마음속과 과거 행적을 아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이 나타난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참된 이스라엘 사람”으로 평가한다. 다른 사람들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의지하여 예수님을 거절하는데(7:15, 27, 41; 9:29), 그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도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거절하지 않고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 나왔다.


저자 요한의 입장에서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란 모세에게 청종하는 사람 곧 모세의 예언을 따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이다. “간사한 것”은 속으로는 딴 마음을 먹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 하는 진실성이 없음을 가리킨다. 마치 야곱이 그의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빼앗은 것과 같은 표리부동의 인격을 가리킨다. 예언서들에서는 주로 입술로는 순종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 대한 불충성과 불성실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됐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통찰에 놀라면서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1:48a). 이것은 예수님의 지식의 근원에 관한 질문이다. 마가복음에 따르면(6:2~3), 예수께서 그의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 가서 가르쳤을 때,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고 질문했다. 그의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무지가 예수님을 배척하는 요인이 됐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1:48b).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있다”는 것은 평화와 번영의 상징이기도 하고(왕상 4:25; 슥 3:10) 혹은 율법을 연구하고 있었던 것을 표시한다. 여기서도 예수는 초월자적 능력의 소유자로 나타난다.


그의 사람됨과 과거 행적을 아시는 예수님의 초월적 능력을 경험한 나다나엘이 대답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1:49). 나다나엘이 말한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알기 어렵다. 그는 율법에 나와 있는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어진 솔로몬과 같은 특출한 지혜의 사람이며(삼하 7:14)


또한 스가랴가 예언한대로 이스라엘을 평화와 번영으로 인도할 왕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시 2:7; 슥 3:10). 오병이어 사건에서 예수님의 권능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를 억지로 왕으로 세우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예언의 성취로 인식한 결과일 것이다(6:15). 아무튼 나다나엘이 “이스라엘의 왕”이란 칭호를 메시아적 의미로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저자가 이 복음서를 저술한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데 있었다(20:30).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이 말을 믿음의 고백으로 규정하셨다(1:50). 그래서 그는 일차적으로 요한공동체가 지향하는 정확한 믿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예수님이 인정하는 합당한 내용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칭호로서 그런 칭호를 사용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신다. 그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왕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거절하셨다(6:15). 나다나엘은 앞으로 그의 고백에 합당한 예수님의 존재를 알아 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현재의 고백의 불충분함을 지적한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것들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1:50). 여기서 나다나엘의 믿음은 예수님의 기적적 능력을 경험한 것에 바탕을 두었다. 그런 신앙은 -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한 국면이기는 하지만, 그의 말씀을 믿음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신비한 연합으로 인도하는 참된 신앙에는 미치지 못한다(cf. 4:48; 14:11). 그는 예수님 안에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볼 것이다”라는 동사는 침례요한의 두 제자를 초청할 때에도 사용됐고(1:39) 또 나다나엘에게 하시는 계속된 말씀에서도 사용된다(1:51). 요한복음에서 ‘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존재에 관한 체험적인 깨달음과 확신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3:12; 4:21~23; 11:40; 14:19; 16:16).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앞으로 예수님을 통해 경험하고 깨닫게 될 큰 일을 언급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1:51).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말한다”는 형식으로 된 첫 번째 말씀이다. 이 엄숙한 선언의 형식으로 된 예수님의 말씀이 요한복음에서 20회 나온다. ‘
진실로’는 요한복음에서 항상 중복 형태(“진실로 진실로”)로 사용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와 함께 사용된다.


공관복음서들에서는 ‘진실로’가 두 번 나오는 중복 형태로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이러한 중복 형태의 표현을 통해 예수의 말씀의 진정성과 효용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개인을 넘어서서 공동체를 향한 권위의 말씀으로 전달한다. 그래서 이 말씀도 나다나엘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너희들에게’ 하시는 공동체적 말씀으로 제시된다.


“하늘이 열린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계획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그 자신이 세상에 강림하는 것 곧 하나님의 계시 활동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적 표현이다(사 64:1; cf. 막 1:10; 마 16; 눅 3:21).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라는 것은 야곱의 환상을 기초한 표현이다(창 28:12). 그러나 천사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야곱의 환상에서는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그 사닥다리가 ‘인자’로 교체됐다. 요한복음에서 ‘인자’라는 칭호가 여기에 처음 나온다. 인자에 관한 저자의 사상의 출발점은 물론 인자에 관해 공관복음서들에 나오는 말씀들이다. 인자 칭호의 기원은 유대교 묵시문학이다.


묵시문헌들에서 인자는 종말에 하나님의 구원을 완결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강림하는 하늘의 존재로 나타난다(단 7:13~14). 요한복음에서 인자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전체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다.
인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화육을 통하여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했으며,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존재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


저자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 곧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인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인자는 하늘에 계셨을 뿐 아니라(3:13), 생명을 주기 위하여 땅에 내려오신 분이다(6:27, 53). 인자는 다시 그가 이전에 있던 곳 곧 그의 본래의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6:62). 그러나 그의 올리어지심은 십자가의 수난을 통하여 이뤄질 것이다(3:14; 8:28; 12:23, 34; 13:31). 옛적에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를 나타내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인자는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자로 나타난다. 인자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들 뿐 아니라 하늘의 일들도 계시한다(3:12).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3:13)라는 말씀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라는 요한복음 서두의 기독론적 말씀(1:18)과 연결된다. 저자는 야곱의 환상(창 28:11~12)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계시로 해석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연결자이며 그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와 현존의 장소이다. 요한은 예수의 다시 오심과 관련하여 ‘인자’를 사용하지 않는다. 인자의 고난에 관한 말씀들(3:14; 8:28; 12:34)도 공관복음서들의 말씀들과 구별된다. 요한은 인자의 고난의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막 8:31; 평행 구절). 요한은 인간이 생명을 얻기 위하여 “(하늘에) 올리어지신 분으로서의 예수”(인자)를 믿어야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인자는 이미 그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도록 정해져 있다(6:62). 이것은 요한 공동체가 독자적으로 ‘인자’ 전승을 발전시켰음을 제시한다. 저자는 공관복음서 전승들에 나오는 인자의 배척당함과 고난 받음을 가리키는 말씀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와 인자의 내려오심과 올리어지심 그리고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자라는 빛에서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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