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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C. 펜윅의 북방선교-끝

한국침례교 최초의 순교자는 1918년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 받은 박노기 목사, 김희서 교사, 전영태 총찰, 최응선 감로였다. 이들은 10월 20일 포시에트해(海) 모커우 지점에서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으로 인해 배가 파선해 해상에서 순교했다.


이 일이 연추와 수청 전 지역에 알려지면서 많은 교회 부흥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동아기독교 순회전도자들은 대게 육로로 이동했는데 왜 이들은 ‘육로’가 아닌 ‘바닷길’로 이동했는지 궁금하다. 이들은 당시 국경지대에 마적단(馬賊團)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이를 피해 바닷길을 선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연구자가 지난해 1월 연해주의 고려인 역사관을 방문해서 초기 한인이 탔던 배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 이유는 배가 너무 초라한 목선(木船)이어서 오늘날의 국제여객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배였다는 사실이다. 큰 풍랑을 만난 작은 배로 인해 순교한 것이었다.


4. 평가
시베리아는 동아기독교의 교회개척이 가장 단기간에 이뤄졌고 빨리 문을 내린 지역이다.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교회개척은 1909년 2월에 첫 교회가 세워졌고, 1925년 가을에 으르싯쓰교회가 마지막으로 개척됐다. 시베리아에 44개의 동아기독교가 세워지는데 16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펜윅은 1924년에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2차 시베리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5년 이후 시베리아에서 동아기독교의 교회개척은 찾아볼 수 없는데 왜 그럴까? 그 이유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공산당의 교회 박해가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라 본다.


실제로 시베리아의 많은 동아기독교인들이 러시아 공산당의 핍박을 피해 함경북도 웅기로 월남하자 한봉관 목사가 1929년 원산 총부에 긴급 구호대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즉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교회개척은 1920년대 말에 정점을 찍은 후 서서히 쇠락하다가 1940년 이후에는 아예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는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에 살던 20만 명의 고려인 중 18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결과 연해주에 있던 고려인 정착촌들은 모조리 폐허가 됐기에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교회는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나가는 말
펜윅의 북방선교(함경도-만주-시베리아)는 ‘3C’ 선교전략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복음을 위해 순교를 각오하는 헌신(commitment)이나, 순회전도(circuit evangelism)의 역할이나, 교회개척(church planting)의 자세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북한 동아기독교의 김영관 목사, 만주 동아기독교의 김영진 목사와 김영국 감로, 재러 동아기독교의 최성업 목사와 최응선 감로는 당대 최고의 북방선교 선교사였다. 


북방선교 선교사는 기도의 사람,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사역이 불가능하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북방선교의 비전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성령에 사로잡혀 자원하는 심정으로 산골짜기나 시골구석까지 들어가서 생명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생명을 바쳤다.


초기한국침례교회(1889~1949)는 북방선교에 78%를 투자할 만큼 영혼구령에 집중한 교단이었다. 그런데 펜윅의 북방선교 가운데 만주를 빼고 북한과 시베리아에서는 동아기독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중국 길림성의 용정, 연변 등지에서는 동아기독교의 자취를 조금 발견할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하듯이 동아기독교의 역사를 땅 속에 묻지 말고 모두가 열정을 가지고 동아기독교의 자취를 찾아내어 다음세대들에게 고귀한 유산으로 물려줘야 한다. 연구자가 제안하는 것은 만주 종성동교회의 김영진 목사와 김영국 감로의 순교터를 발굴하는 작업이나 연해주 포시에트에 4인 순교자의 순교 기념비와 동아기독교회 기념교회를 세웠으면 한다.


이스라엘 성지순례처럼 북방선교의 흔적을 지닌 동아기독교의 선교유적지를 만들어 다음세대들이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이 일에 한국침례교회가 관심을 갖고 기도해서 “은혜의 130년, 다가올 침례교 시대”를 활짝 여는 일에 동참한다면 한국침례교회는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