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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인자’(사람의 아들) 기독론(6)

신약성서에 나타난 신학 산책

김광수 특임교수
침신대 신학과

요한의 인자 기독론(5)에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상황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변호하기 위해 하신 인자 말씀에 담긴 의미를 살펴봤다.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죄 가운데서 죽고 멸망하는 존재라는 것과 그들은 인자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야 예수님이 바로 그 인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번에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마감하는 상황에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건과 관련해 하신 예수님의 인자 말씀의 의미를 살펴본다.


헬라인들이 찾아왔다는 제자들의 보고를 받은 예수님은 그의 사역의 궁극적 국면 곧 그의 죽음을 언급하는 기회로 삼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 예수님은 헬라인들의 요청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 대신 그것에 의해 촉발된 상황에 관한 신학적 해석을 제시한다.


예수님이 그들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헬라인들에게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의 길을 통과해 가셔야 한다(11:24). 지금까지 예수님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해오셨다(2:4; 7:30; 8:20). 그러나 이제는 그의 때가 도래했는데, 그 때는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로 묘사된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인자’로 부르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와 화육 그리고 부활과 승귀를 다 포함하는 요한의 신학을 반영하는 칭호다. “영광을 받는다”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과 그가 이전 있던 곳으로 올리어지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그가 영화롭게 되는 때의 시작이다. 그는 영광을 받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끄는 권세를 받게 될 것이다(13:32; 17:1~2).


그는 창세 전에 그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의 존재로 복귀할 것이다(17:5). 그러나 그가 영광을 받는 궁극적 목적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다(17:2). 예수님은 헬라인들이 그를 믿으려고 나오는 상황에서 그의 죽음의 때를 언급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모든 사람 곧 유대인들은 물론 헬라인들까지 그를 통하여 생명을 얻는 새로운 시대(때)의 도래를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때의 도래와 관련해 그의 죽음에 관한 교훈을 씨의 비유를 통해 전달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이 비유는 죽어서 열매를 맺는 씨가 예수님 자신이라는 비유적 성격을 포함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풍성한 선교의 열매를 맺는 필수 요건이다. 여기서 열매를 맺기 위한 죽음의 필연성과 그 죽음의 놀라운 결과가 강조된다. 죽음의 필연성은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라는 조건절에 의하여 강조되며, 12:34에서 “인자가 반드시 들려야한다”는 필연성의 조동사에 의해서도 암시된다.


반면에 그 죽음의 놀라운 결과는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을 통해 표현되고,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는 언급에서 강조된다(12:32). 그러나 이 비유는 예수님 자신만을 가리키는 교훈은 아니다. “한 알의 밀”이란 어구는 단 한 개의 밀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파종을 위해 채로 걸러진 한 무리의 밀을 가리킨다.


이 어구의 이러한 집합적 성격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열매 맺음이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열매를 맺기 위하여 통과해야 할 필연적 길임을 제시한다. 이 의미는 초대 교회에서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라는 명언을 통하여 표현되기도 했다.


이 비유적 교훈은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그의 예고의 맥락에 위치한다. 공관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예고는 인자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세 번에 걸친 체계화된 예고를 통해 전달됐다. 이 비유와 공관복음서들에 나오는 수난 예고와의 연결성은 그 다음에 나오는 제자직에 관한 교훈들(12:25~26)에 의해서 제시된다. 공관복음서들에서도 인자의 수난에 관한 예고 후에 제자직에 관한 유사한 교훈들이 제시된다(cf. 막 8:34~38).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가야할 숙명적 길과 제자들이 가야할 길이 연결되어 있음을 교훈한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12:25). 이 말씀은 공관복음서들에서도 거의 동일한 형태로 전달된다.


요한복음 12:25~26이 마가복음 8:34~35과 긴밀하게 연결된 것은 요한이 이 말씀의 마가 전승을 염두에 두었던 것을 보여준다. 이제 헬라인들이 방문한 상황은 가려지고, 예수님은 이 때를 제자직에 관한 교훈을 전달하는 기회로 삼으신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급진적 교훈이다. 예수님의 가야할 길이 죽음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는 길인 것과 같이, 그의 제자들도 역시 죽음을 무릅쓴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 자기 생명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체적 생명 혹은 신체적 삶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서”라는 어구는 이 세상에서 신체를 가진 삶의 목적과 내용을 강조한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결국은 그를 이용하여 자기의 기대와 소원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추구하고 노력했던 생명과 구원의 역사에는 참여할 수 없다. 그래서 공관복음서 전승에서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라고 제시된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다”라는 말은 자기 존재를 열등하게 생각한다거나 혹은 무가치하게 간주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자기가 추구하는 것의 중요성 면에서 우선순위의 요소 곧 자기 생명을 두 번째로 간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은 예수님이 추구하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계승하고 재현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쳐 일하는 사람이다. “영생하도록 보존하다”는 것은 나사로 부활 사건에서 제시된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신체적 생명을 영원히 보존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소유하고 누렸던 생명 곧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생명을 영원히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10:11).


예수님은 제자직의 근본 목적과 함께 제자직의 근본 자세를 제시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시리라”(12:26). 이 한 구절에 ‘섬기다’와 그것과 관계된 단어가 세 번 나온다. 이것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의 삶의 목적이 그를 섬기는 것이 돼야 하며 또 그래서 그를 섬기기 위해서는 그를 따라 가야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된 대로(12:24),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이 구절은 제자직의 근본 자세를 말하는 마가복음 8:34과 매우 유사한 구조로 제시된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예수님의 목적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목적은 그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세상에 와서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기 위하여 일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예수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뜻을 섬기는 제자직에의 초대는 그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준비를 포함한다. 예수님을 섬기는 삶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삶이다. 이 말씀 역시 제자들의 선교 활동의 상황을 반영한다. 제자들은 그들이 전파하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죽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증언할 뿐 아니라, 그들 자신들의 죽음을 통하여 그 열매를 맺게 됨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초청에는 명령과 약속이 있는데, “나를 따르라” 이후에 나오는 말씀들은 그의 명령을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약속이다. “나 있는 곳”은 요한의 기독론적 이해에서 예수님의 궁극적 존재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그의 목적을 완성한 후에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며 그 후에는 다시 와서 제자들을 인도해 그가 있는 곳에 그들도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14:1~2).


그래서 “나 있는 곳”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후에, 그의 변형된 존재 곧 그가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가 된 존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거기 있을 것이다”라는 미래 시제는 종말론적 의미에서 제자들의 죽음을 통해 이르게 될 주님과의 연합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이르는 것 곧 올리어지신 주님과 하나가 되고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받을 최고의 보상이다.


그러나 요한이 강조하는 현재적 종말론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게 되는 것은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것으로서 올리어지신 주님이 지금 이 세상의 삶에서부터 그들과 함께 거하심을 가리키기도 한다.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신다”라는 말씀도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나타낸다. “귀하게 여기다”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됐다(5:23).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영광을 구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시는 것과 같이(8:50, 54), 하나님은 예수님을 섬기는 제자들을 마찬가지로 대우하신다.


귀하게 여기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누리는 영광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예수를 섬기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또 그들에게 아들이 창세 전부터 가진 영광에 참여할 특권을 주신다(17:24). 제자들은 예수님의 목적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되었으며 또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는 완전한 연합의 관계에 참여하도록 초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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