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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인자’(사람의 아들) 기독론(7)

신약성서에 나타난 신학 산책

김광수 특임교수
침신대 신학과

지난 원고에는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상황에서 예수님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자기의 죽음을 땅에 떨어져 심겨지는 밀알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에 나타난 의미를 살펴봤다. 이번에는 그 말씀의 연장선에서 예수님이 자기의 증언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질문과 그것에 대답하신 말씀에 담긴 인자의 존재에 관하여 살펴본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무리의 반응을 전달한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말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12:34). 무리는 율법에 기초한 메시아관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인자에 관하여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함을 언급한다. 여기서 무리가 가진 메시야관이 무엇이며 또 그들이 올리어지심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제시된다.


먼저 무리는 율법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현존을 말한다고 간주한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서 지금까지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율법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시편 89:36에는 “다윗의 씨가 영원히 계신다”라고 나오는데, 그 시편에는 메시아에 대한 언급이 두 번 나온다(시89:38, 51). 그러나 그 시편의 문맥에서 그리스도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는 신념이 중간기 유대교 묵시문학에 나온다(에녹1서 49:1; 62:14; 솔로몬의 시편 17:4). 그들은 그들이 가진 전통적인 메시아관에 기초하여 인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인자에 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인자는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즐겨 사용한 칭호로서 예수님의 계시의 말씀들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비밀로 남아있다. 다음에 그들은 “올리어지는 것”을 “영원히 계시는 것”과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무리의 말의 해학적 성격 곧 그들의 말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오해가 결합되어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올리어지는 것”을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의 끝으로 곧 그가 그들 곁에서 떠나는 것으로 이해한 점에서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떠남이 제자들과의 영원한 함께하심을 위한 것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이라는 말씀에 대하여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어찌하여’는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가?”라는 반발을 표현한다. 무리의 말은 협의의 문맥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부정확한 인용이다. 예수님은 일인칭 대명사로 “내가 들리면”이라고 말했을 뿐(12:32), 인자에 관한 언급은 앞 단락인 헬라인들의 등장 문맥에서 나오며(12:23) 또 “들려야 한다”라는 필연성도 여기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무리의 말은 실제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나온 것의 문자적 인용이다(3:14). 따라서 무리의 질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서 제시된 인자에 관한 교훈들을 토대로 제기된 결론적 질문이며 또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에 대한 최종적 반대의 의사표시였다(7:27, 31, 41-42; 12:34). “이 인자가 누구냐?”라는 무리의 질문은, “내가 (인자를) 믿나이다”(9:38)라는 소경되었던 사람의 고백과 대조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고 또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피상적인 것 밖에는 알지 못하는 유대인 대중의 영적 상태를 반영한다.


예수님은 끝까지 믿음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그들을 향하여 인자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마지막으로 초청하며 경고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12:35). 예수님은 무리가 제기한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답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의 공적 활동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그들을 빛의 세계로 초청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바로 앞에서 제기된 질문(12:34)에 대한 대답이기보다, 그의 활동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대 전체에 대하여 대답하는 국면을 갖는다.


이러한 국면은 무리의 질문이 인자의 올리어지심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 전체를 대상으로 제기된 점과 요한복음 12장이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대한 요약과 결론을 제시하는 점에서도 반영된다.
빛, 어두움, 그리고 어두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교훈의 중심적 주제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 용어들이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다”는 말씀은 얼마 남지 않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가리킨다. “너희 중에 있다”는 말은 “우리 중에 거하셨다”(1:14)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한다. ‘잠시 동안’은 고별강화에서 제자들을 위한 교훈에서도 특징적으로 사용된다(16:16~19).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마감되고 있는 위기 상황을 가리킨다(9:4; cf. 사 50:10).


‘다니다’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빛과 어두움과 관련하여 상징적으로 사용됐다(8:12; 11:9~10; 12:35). 그 단어는 8:12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됐으며 또 여기서도 그를 믿는 것과 관계된다. 그래서 다음 구절에서는 “빛을 믿어라”라는 초청으로 이어진다(12:36). 예수님의 이 호소가 그의 죽음과 부활 후에는 그들이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이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공생애를 다루는 역사적 시각에서 그의 사역의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은 상황의 긴박성을 표현한다.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는 직역하면 “어두움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을 사로잡아 굴복시키는 어두움의 권세를 강조한다. 요한복음에서 ‘어두움’은 독생자를 통한 하나님의 생명 역사를 거부하며 대적하는 근원적 세력으로써 지금 유대교 당국자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배후에서 활동하는 악의 세력으로 제시된다(1:5; 3:19; 5:24; 8:31). ‘붙잡히다’로 번역된 단어는 빛과 어두움의 대결에서 빛의 승리를 가리키기 위하여 요한복음 서문에서 사용됐다(1:5).


그 어두움의 권세로부터 이기는 길은 오직 세상의 빛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다(8:12; 12:46). 빛과 어두움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요한복음에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 국면을 특징적으로 나타낸다. 모든 인간은 소경으로 태어나지만(9장),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의 빛”을 얻는다. 예수님의 초청은 어두움 속에 사는 것에 대한 경고를 포함한다.


“어두움 속에서 다니는 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 아직 어두움에 잡혀있는 사람이다. “그가 가는 바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인간 존재의 궁극적 운명 곧 죽음과 그 후의 심판에 관하여 알지 못함을 가리킨다.
무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빛으로 나오라는 초청으로 이뤄진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12:36a).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는 앞 구절에 나온 것의 반복이다. 예수님은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하여 왔기 때문에, 심지어 지금 이 마지막 시점에서도 어두움의 권세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는 있다.


앞 구절에서 ‘다녀라’는 초청이 “빛을 믿으라”는 구체적인 믿음에의 초청으로 제시된다. 요한복음에서 유일하게 빛이 믿음의 대상으로서 비유적으로 제시된다. “빛의 아들들”에서 ‘아들들’은 공관복음서들과 바울 서신에 많이 나오고 요한복음에는 매우 드문 용어다. 요한이 선호하는 용어는 중성 단어인 ‘자녀들’이다(1:12, “하나님의 자녀들”). 바울 서신에서 빛의 아들들은 복음을 대적하는 어두움의 아들들과 대조되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살전 5:5; 엡 5:8~14).


예수님은 인상적이면서도 긴박한 호소로 그의 강화를 마치셨다.
그것은 단순히 무리와 대화의 종결이기보다, 그의 공생애에서 이루어진 공개적 강화 전체의 마침이었다. 요한은 이 후의 예수님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12:36b). 예수님이 그의 공개적 강화 후에 무리에게서 숨은 것은 이미 요한복음 8장에서도 있었다. 거기서는 예수님의 강화 후에 그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했기 때문에 숨으셨다(8:59). 여기서도 예수님은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떠나가서 숨었다.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 숨었다는 것은 그의 강화에 대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반응을 암시한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공개적 강화 전체를 통해 그들은 부정적 반응을 보여 왔으며 또 그들의 그런 부정적 반응은 그를 죽이려는 공회의 모의에서 절정에 달했다.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그들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 예수님이 다시 그들에게 나타날 때에는 세상에서 그의 마지막 시간이 될 것이다.
이제 무리가 그를 보게 되는 것은 그들이 거절한 사람의 고통 받는 모습 곧 고난 받아야 하는 인자의 모습이 될 것이다(19:5, 37). 이제 예수님은,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3:14)라고 예고하신 대로, 유대인들 앞에 나타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게 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