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복음서에서 ‘인자’(사람의 아들) 칭호는 공관복음서와는 사뭇 다르게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많이 사용됐으며 또한 요한은 인자 칭호를 통해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유일성과 그 유일한 분이 주시는 구원의 유일성을 강력하게 제시했다.
‘인자’는 표면적으로는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의 존재로써 유대인들이 보기에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유력한 집안 출신도 아닌데 기적적 일들을 행하시며 감동적인 교훈을 가르치는 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인자’는 근원적으로는 영원한 권능의 인격의 하나님이신 로고스이시며 화육해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 속의 한 인간으로 사셨으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의 존재로 복귀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이번 호에서는 요한복음서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된 인자 말씀(요 13:31)을 통해 화육의 사명을 완수하신 인자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존재로 돌아가심에 관하여 알아본다.
요한복음서에서 ‘인자’에 관한 마지막 말씀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가진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가룟 유다와의 대화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배반의 마음을 간직한 채 만찬 자리를 떠난(요 13:30) 직후에 나온다. 또한 예수님은 이 인자 말씀 다음에 인자의 영광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내실 영광과 직결된 것에 관해 추가로 말씀하셨다(요 13:32).
‘인자’에 관한 마지막 말씀으로 시작하는 이 단락(요 13:31~38)은 최후의 만찬과 그 후에 나오는 예수의 강화 사이의 전환을 이루는 말씀들로 구성된다. 그 말씀들은 새 계명과 또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두 번째 대화를 포함하는데, 그것들은 둘 다 발을 씻기는 것은 물론 이 후의 고별 강화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여기서 유다의 떠나감과 함께 예수님 자신의 삶의 종결이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는 선언으로 표현된다. 유다의 떠나감은 밤과 어둠의 도래를 가리키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독생자로서의 영광을 받는 때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인간의 악의 표현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인간의 치유와 회복이라는 생명의 역사를 이루신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나가 그들의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그들이 예수님과 맺은 생명의 관계를 세상에 나타내야 한다. 유다의 떠나감은 요한복음서의 독특한 주제인 예수님의 떠남과 영화롭게 되심으로 이어진다.
이 주제는 고별 강화 전체를 통하여 발전되는데, 이 단락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예고와 연결된다. 베드로가 부인한 것은 매우 극적인 형태로 소개되며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과 대조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에 참여할 것을 자랑스럽게 확신한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 확신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그가 먼저 절망적 실패와 회복을 경험해야 한다(21:15~22). 이 단락에서 베드로에게 예고된 것은 후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릴 것이라는 예고로 반복된다(16:32).
예수님은 밤에 속한 사람인 유다가 떠나간 후에 남아 있는 제자들을 위한 교훈을 제시하는셨데, 그 교훈은 영광의 선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13:31~32). 예수님의 말씀에는 시간에 관한 언급들이 포함된다.
유다가 떠나감을 통해 제자 공동체에서 배반의 요소가 제거됐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시작됐다. 그래서 “유다가 나간 후”라는 시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수난의 시작을 가리킨다.
요한은 배반자의 활동과 관계된 시간을 묘사하기 위하여 ‘곧’이라는 부사어를 사용했는데(13:30), 예수님의 영광의 시간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다시 사용한다(13:32). 유다가 곧 나간 것과 같이, 이제 예수님도 곧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활동이 긴박하게 진행되고 그것과 함께 도래할 예수님의 영광이 ‘지금’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집중된다.
여기서 ‘지금’은 이 사건이 일어난 제자들과의 저녁 식사 상황보다는 전체 항의 시작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때 곧 그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때(13:1)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죽음의 때를 알리는 감람산 기도(12:27)에서 사용됐으며, 그 후에 이 세상의 심판에 관한 말씀에서 두 번 사용됐다(12:31). 거기서도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때 곧 그가 십자가에 올리어지고 또 그것을 통하여 영화롭게 되는 때를 가리킨다.
그 문맥에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때가 ‘왔다’”(12:23) 또한 “내 마음이 ‘괴로웠다’”(12:27)라고 완료시제로 표현된 것은 그 때가 어떤 한정된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리어지심을 통해 완결되는 사건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완결되는 그 때는 유다의 떠나감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십자가 사건을 포함해 그것과 관련된 모든 사건들 속에서 이미 도래했으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이 역설적으로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영화롭게 되는 영광의 시간으로 제시된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영화롭게 하다”/“영광스럽게 하다”라는 동사를 다섯 번이나 사용하면서 이 사건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말씀은 그 동사를 중심으로 교차대구적 구성을 보여준다: A.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 B.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받으셨다; C. 만일 하나님이 그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셨으면; B'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라; A' 곧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라.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은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12:23)는 말씀과 관계되고 또한 하나님이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내가 영광스럽게 했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12:28)라는 말씀을 반영한다.
이 구절들은 두 가지의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나타낸다: (1) 인자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2) 그것은 또한 앞으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에게 일어날 모든 일들을 말한다. 여기서 이 동사는 “영광스럽게 되었다”(13:31)와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13:32)라는 쌍으로 사용된다. 이것은 두 순간이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데, 그 가까움은 마지막 구절의 ‘곧’이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된다.
가룟 유다를 통한 어두움의 활동이 두 순간(조각을 받고 곧 나감)으로 나타난 것과 같이, 빛의 활동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순간으로 나타날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십자가에 올리어지심을 통하여 세상을 떠날 것이지만, 그는 그 다음 단계의 영광인 부활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다.
“영광을 받았다”라는 부정과거 시제는 방금 일어난 일을 기초해 유다의 떠나감과 함께 예수님의 수난과 영광이 이미 시작된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심에 따라 하나님도 예수님 안에서 그의 완전한 순종의 헌신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다.
이것은 요한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강조된 신학 곧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은 물론, 인자가 되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하나님의 주권과 경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을 강조하는 말씀을 추가한다(요 13:32). 거기서는 앞 절에서 사용된 부정과거 시제(“영광을 받았다”)가 이제 하나님이 예수님의 수난을 넘어 이루실 영광의 미래시제(“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로 바뀐다. 예수님은 이제 그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리어지시는 죽음을 통해 받을 영광은 그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중에 들어감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영광의 사건으로 인정을 받는다. 예수님이 행하신 자기-희생의 행동 속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과 같이, 하나님은 그렇게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심을 통하여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곧’이라는 부사도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하나의 국면으로 이해하는 요한복음서 저자의 독특한 신학을 반영한다.
요한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은 그의 십자가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십자가 사건 그 자체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비록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그의 장사됨과 빈 무덤의 발견 사이에 삼일의 시간이 걸렸지만, 요한의 신학적 입장에 따르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올리어지심과 다시 오심은 하나의 연속적인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