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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극복을 위한 목회자 세미나

최성은 목사
지구촌 교회

코로나19 시대를 보내고 있는 침례교회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침례교 총회는 지난 618일 지구촌교회(최성은 목사)에서 온라인으로 코로나19극복을 위한 목회자 세미나를 진행했다. 이에 본보는 온라인으로 진행한 5명의 강사(최성은, 유관재, 최병락, 김중식, 안희묵 목사)의 강의안을 요약해 게재한다.



포스트 코로나 3.8 전략


이제는 어느 시대보다 더 목회하기 힘든 시대가 됐다. 종말론적인 상황, 포스트 모던 세대, 자아 중심적 세대, 권위 해체 시대, 절대적 진리 상실 시대,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가 전세계적으로 팬데믹(pandemic) 대 유행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뉴 노멀(New normal) 이제는 코로나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생활을 정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몇 주 안으로 코로나 확진자는 전세계적으로 900만명이 넘어설 것이며, 사망자는 50만 명이 넘을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엄청난 사회 문화적 변화들이 이미 진행 중이다. 우리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피할 수 없는 변화들을 강제로 맞이하는 세대가 됐다.


데이비드 월러스 월즈(David Wallace-Wells)가 쓴 “2050년 거주 불능 지구”(The Uninhavitable Earth)라는 책은 기후 온난화에 대한 지구의 종말에 대해 언급한 책이다. 특별히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재앙에 대한 예측은 비기독교인들 역시 종말의 때를 감지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모든 분야에서 우리에게 변화가 찾아왔고, 인류 역시 변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한다. 그래서 앞으로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수 많은 서적들이 쏟아진다. 변화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물론 우리 시대가 코로나라는 겪어보지 않았던 바이러스가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있지만 이 문제가 인류 역사상 과연 우리 시대 가장 힘든 문제인지 묻고 싶다.


교회 역사를 보면 수많은 순교의 역사들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교회 역사 2000년간 초창기 로마제국과 이슬람이나 근데 공산권에서 수없이 많은 희생과 핍박과 압제를 경험했다. 지금도 역시 전세계 기독교인 1/3이상은 그런 상황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의 선배, 동료들은 죽음으로서 복음을 지켜 냈고 그 복음을 우리들에게 전해 줬다.


그리스도인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무리 위력이 있어도 결코 복음의 능력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시대의 도전과 신앙의 위협 속에도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다.

바울은 고전 2장에서 내가 십자가와 거기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어떤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했다.바울이 당시 당면했던 도전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코로나 사태로 겪는 어려움보다 훨씬 더 큰 어려움들이었다. 자동차나 대중교통이 없던 시절, 그 흔한 핸드폰도 없던 시절, 인터넷이 없으니 이메일을 할 수 없던 시절, 교회 건물은 커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체만으로도 생명을 위협받았던 시절이었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했던 길을 터키에서 걸어본 적이 있다. 어떻게 이런 길들을 걸어서 당시 전세계에 복음을 전했을까? 정말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그런 바울에게서 오늘 3가지의 핵심 교훈을 먼저 배우고자 한다.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변하지 않는 진리, 본질이 있다. 먼저 이 본질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고린도전서 2:1~5 말씀을 통해 코로나 상황 이후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아야 할 목회의 본질 3가지를 먼저 함께 나눈다.


 

첫 번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선포하라(1~2).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가 목회를 할 때에 그의 말이나 그가 가진 지혜로 목회를 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목회나 설교가 말이 화려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사역이 화려한 부분이 없더라고 우리가 결코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다.


저는 지구촌교회 부임 초기,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란 내용으로 설교하면서, 이제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깃발을 흔들면서 마른 막대기가 되겠노라가 선포한 적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설교하는 것만큼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가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라(3~4).

천하의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할 정도면 고린도교회는 보통 힘든 교회가 아니었다. 웅변이 아볼로에 비해서 딸린다고 비교를 당했다. 더불어 설교를 못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육신이 연약하다는 비난도 들었다. 심지어 헌금을 착복했다는 누명도 받았다. 목회자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비난을 받았다.


우리는 목회자로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많은 죽을 고비와 고난을 경험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연약함이 그의 겸손함이 됐다. 그때마다 고난 가운데서 바울이 의지한 변함 없는 능력은 성령의 역사하심이었다. 성령의 역사를 사도 바울이 의지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서 십자가의 복음만을 선포했다. 성령의 역사를 붙드는 것이었다. 코로나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 안에서 함께 연합하는 기도사역이다. 이 본질만큼은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앞에 돌려 드려라(5).

모든 것을 시작할 때, 감당하는 동안, 그리고 모든 사역을 마친 후에도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될 것이다. 나 같은 연약한 질그릇에 심히 능력이 큰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져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를 망각할 때 교회는 망가지고 아픔을 겪게 된다. 그러나 부족하더라도 우리가 무엇을 진행하는 동안, 그리고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순간에도 그 모든 일을 능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린다면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도 기뻐하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목회 성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 중요한 것이다. 순종이 승리를 주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것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는 분명 실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부르심에 순종하셨고, 하나님은 부활의 승리를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이룬 후에 그것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다. 실패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 실패해도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려야 한다. 본질을 따랐는데도 교회가 성장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


앞으로 코로나 이후에는 그런 현상들이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사실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런 실패를 많이 경험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영적인 실패를 경험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실패와 성공은 하나님이 규정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고, 고난 가운데 성령님만 의지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린다면 코로나든 기근이든, 전쟁이든, 어떤 재앙이든 주님 오실 때까지 변하지 않는 우리가 붙들고 있어야 하는 본질이다새로운 전략을 짜고,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갖은 애를 쓰며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기 이전에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 세 가지의 본질을 붙들고 목회했는가를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다.


사우스이스턴침례신학대학교 교수인 존 이와트 목사(John Ewart)의 저서인 뉴 노멀(New Normal, 요단)이란 책에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내는 목표를 세우지만, 결국 그것은 ?’ 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의 본질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사명을 재점검하는 것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중심 축이라고 역설한다.


변하지 말아야 할 본질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이제 그 본질을 담을 그릇이 시대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봐야 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536~39절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을 것을 강조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새 포도주라면 유대교는 그것을 담는 그릇이었다. 유대교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는 그릇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코로나 상황 이후 반드시 변해야 할 8가지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담는 그릇이 바뀌어야 하는 중대하고 거대한 변화가 시작됐다.

미국 뉴욕에는 133년 전통의 피터 루거라는 아주 유명한 식당이 있다.


유명한 식당은 뭔가 색다를 특징이 있는데 이 식당도 예외는 아니다. 이 식당의 음식의 맛을 일관되지 않고 직원들의 서비스가 불친절하며 신용카드를 받지 않고 오직 현금 결재만 가능한 특이한 식당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이 식당은 2개월간 문을 닫으며 폐업의 위기를 맞이했다. 뉴욕은 현재 세계 최악의 코로나 감염도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이 식당이 살아남기 위해 식당의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먼저 불친절한 식당 종업원들의 친절해지기 시작했고 도도하기로 유명한 이 식당이 음식 배달 서비스를 전격적으로 도입했다. 늘 현찰만을 고집했지만 이제는 신용카드로 결재가 가능하며 음식의 질과 맛도 일관되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133년 된 식당의 고집불통 전통을 바꾸고 살기 위해 서비스의 질을 높였다. 식당의 본질은 음식을 파는 곳이다. 사실 시대에 맞지 않는다면 그 본질 빼고는 다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비성경적인 전통을 고집하는 교회는 문을 닫을 것이다. 고집불통인 기업들, 국가도 파산할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측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것은 시작되고 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오직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말씀, 그리고 그것에 순종하는 사명자들만이 영원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우리의 인생도, 목회도, 앞으로 다 마찬가지이다.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건 어떤 위협에서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하여서 성령님은 지금 우리에게 본질을 담는 그릇이 변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코로나 상황 이후 변해야 하는 첫 번째는 사탄에게 양보한 가상공간을 탈환하라.

우리는 그동안 인터넷 공간이나 사이버 공간이 영적이지 않은 곳이라 여기며 오랫동안 방치해뒀다. 10대들은 여가 시간의 70%를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고 한다. 어른들은 40% 정도라고 한다.


인터넷 공간에서 삶을 보내는 시간은 상상을 초월한다. 스마트폰은 우리 몸의 일부분이다. 때문에 우리는 사탄에게 내어준 가상공간을 복음을 증거하고 사람들을 살리는 순기능으로 만들어야 한다.


현재 코로나 현상 가운데 인터넷 사역을 활발하지 않은 전통적인 교회들마다 어려움에 처해졌다. 사실 교회 사이즈에 상관없이 미디어 사역은 반드시 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됐다. 코로나 상황이 이것의 중요성을 턱밑까지 오게 만들었다.


교회에서 만든 영상을 유튜브에서 시청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높은 시청자들의 연령대는 50~60대로 나타났다. 예상하는 것처럼 가장 낮은 퍼센트의 시청자들은 10~20대이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일반 세상 영상물들을 유튜브 상에서 시청할 때는 정확하게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것은 교회 콘텐츠가 세상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진리를 가지고 있는 공동체이다. 화려한 기술이나, 장비가 부족하더라도 일단 콘텐츠가 좋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변하지 않는 그릇은 여전히 십자가와 부활, 복음의 메시지이다. 이제는 이것을 담는 그릇이 변화돼야 한다. 인터넷 공간을 활용하는 것은 이제는 선택이 아니다. 비대면 시대의 필수이다. 모르면 배우고 노력하고 활용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은 코로나 사태를 통해 모든 교회들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계시다.


 

두 번째로 모든 목회 시스템을 소그룹으로 전환하라

미디어 사역의 맹점이 있다. 인간의 욕구는 대면하고 싶은 것이다. 기계나 가상공간이 인간의 모든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없다. 신세대를 가장 많이 이해하고 상업하는 곳이 스타벅스와 애플이다. 문화를 연구하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평상시에는 인터넷 공간을 즐기지만, 신세대는 어느 순간에 보면 스타벅스 커피숍에 나와 있다. 2명 혹은 3~4명씩 대화한다. 혼자 있는 사람이라도 내면의 욕구는 사람들 주변에 있고 싶은 것이다. 집에서 커피 마실 수 있지만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나오는 것이다.


대그룹 예배만으로 사람은 변화되지 않는다. 우리가 대그룹 예배에서 크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초월하심을 느낀다면, 소그룹은 나와 함께 하시는 내재적인 하나님을 경험한다. 소그룹은 대 예배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을 삶 가운데 함께 나누는 시간이다.


지구촌교회는 1년에 한 번씩 대예배를 하지 않고 목장으로 모였다. 이것은 재난이나 핍박, 전쟁에 대비해서 오래 전부터 교회가 실시해온 사역이었다. 교회 전체가 훈련을 받았기에 이 코로나 팬데믹을 비교적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건강하게 복음을 선포하며 소그룹을 지향하는 교회는 더 강력해질 것이다.


미국 휘튼대학교 릭 리차드슨 교수(전도학)는 최근 “You found me”라는 책에서 앞으로 가장 효과적인 전도방식으로 초소형 신앙공동체(Micro Church)를 이야기했다. 10명 이상이 아니라 2명에서 6명 정도의 수가 복음을 전도하기에도 신앙생활하기에도 가장 적당한 시대라는 논지이다.


실제로 종교적 자유가 없고, 핍박이 강한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런 초소형 신앙공동체(Micro Church)가 큰 힘을 발휘했다. 우리는 모든 목회 시스템을 성경적이고 초대 교회를 모델 삼아서 셀그룹으로 전환해야 한다. 대그룹 현장 예배도 포기할 수 없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셀그룹 목회이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은 셀그룹 목회 철학이 복음을 건강하게 담아내는 새가죽 부대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셀그룹도 매스컴의 공격을 받아 비대면으로 인터넷에서 모이고 있지만, 안정되면 어김없이 가장 활성화될 것이다.

 

세 번째로 소그룹 모임보다 더 작은 단위인 가정 사역을 든든히 하라

코로나 시대에 많은 성도들의 고백은 정말 오랜 만에 가정예배의 회복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비대면을 원칙으로 하는 정부의 방침이나 두려움 때문에 목장교회조차 사이버 공간에서 이뤄졌다. 이 부분은 코로나 이후에도 지속적인 훈련과 점검이 필요하다.


그러나 셀그룹에 훈련된 성도들은 가정으로 들어가서 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믿지 않는 부모님들과 TV 앞에 모여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교역자나 많은 평신도 리더들도 거의 평생 처음으로 가정에서 세족식을 하고, 성찬식을 했다고 감격해한다.


셀그룹에 훈련되면 부모는 가정에서도 리더가 되어서 자녀를 축복하게 된다. 코로나 팬데믹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고 일깨워줬다.

목회자는 가정 예배 메뉴얼을 만들어 주고, 지속적으로 제공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하다는 목회 철학을 회복해야 한다.

 

네 번째로 주일학교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꿔라.

한국교회는 일부 성도들에게 자녀들 신앙은 교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녀의 신앙에 대한 책임을 궁극적으로 부모에게 물으실 것이다.


교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방법과 방향을 제공해 주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자녀들을 주일에 예배드리게 해 주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집에서 주일 학교 교사가 되도록 부모들을 훈련 시켜줘야 한다.


유대인은 2000년간 나라와 주권과 영토 없이 살아왔지만, 그 민족성과 구약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바로 가정이었다.하브루타 교육 방식은 토론에 유용하고, 탈무드 교육은 지혜를 길러주는데 최고이고, 쉐마 교육은 말씀에 바탕을 둔 최고의 신앙 철학이다.


이 세 가지에 대한 좋은 책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는데 이런 서적을 구비하고, 목회자가 먼저 공부하고, 교회의 부모들에게 필독서로 제공하고 서로에게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부모들의 리더가 나와서 그들이 교육 전도사의 역할을 대신해 주는 것이다.


한국교회 절반 이상은 교육 전도사를 둘 수 없는 상황이다. 구할 수 없다면 내부에서 만들어야 한다. 주일 학교 교육의 패러다임 시프트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이들을 계속 세상에 잃어 버릴 것이다.

 

다섯 번째로 이웃과 소통하고 연대하라.

코로나 사태를 해결하는 세상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연대, 연합이다. 이것은 한국의 6만여 교회가 먼저 실행해야 하는 부분이다. 지역마다 지방회나 이웃 교회를 중심으로 연대해서 이웃을 돕는 행사를 기획하라. 지구촌교회 주변에 있는 13개의 중대형 교회들과 연합하여 사역들을 3개월간 귀중한 사역들을 함께 했다.


대구시에 수억원을 함께 기부했다. 성남시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사례의 30% 이상을 NGO단체에 기부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을 지명하는 빅토리 백신 캠페인을 벌이고 있고 지금도 계속 실행 중이다. 부활절에는 저녁 연합 예배와 성찬식을 온라인으로 함께 인도했다. 다같이 설교하고 기도하고 파트를 맡고 찬양도 함께 했다.


코로나 시대에 교회의 역할은 연합과 나눔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교회가 독자적으로 교단을 돕고 각 사역들을 진행함과 동시에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연합해서 함께 도우면 더 큰일을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한국교회 전체 이미지를 살려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 부분에 많이 실패했다.


개인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은 모르게 해야겠지만, 교회가 사회를 도운 일을 세상이 알아야 복음을 전파하는데도 큰 다리 역할을 해줘야 한다.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믿는 영적인 부분에는 핍박을 받았지만, 그들의 삶과 구제를 하는 행보에는 칭찬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제는 모이는 예배에서 흩어지는 삶의 예배로 드리는 부분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야 할 때이다.

 

여섯 번째로 대사회적인 사역과 복음 전도가 함께 가는 시스템을 구축하라.

이 부분에 대해 즉 빵이냐 복음이냐에 대해 과거 한국교회는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이것이 사탄의 전략이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면서 복음을 증거하셨다.

복음은 통전적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담아내야 할 그릇이 이웃을 사랑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돼야 한다.


코로나가 한국에서 한참 기승인 지난 4월에 경기도 어느 한 교회에서 성도들이 마스크를 제작해서 배포하는 모습을 봤다. 교회 성도가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교회가 그래도 건물은 있는데, 개방형으로 마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교회를 보니 마치 마을 회관 같았다. 우체국에서도, 병원에서도 주변 노인들도 그 교회를 와서 면 마스크를 받아 가려고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교회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교회도 어려운 데 우리를 위해 이런 일을 해준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포스트 모던 시대는 보이는 복음이 필요하고, 복음으로 살아내는 크리스천이 필요하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바이러스는 그 모든 악한 바이러스를 단 한 순간에 없앨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 우리의 목회는 모판 자체를 다시 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번 기회에 우리의 목회 토양과 그릇을 완전히 새롭게 하고 계신다.

 

일곱 번째로 중보기도 사역이 교회의 영적 뿌리가 되게 하라

중보자는 중보기도 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중보자의 역할은 교회 담임 목회자와 리더들의 역할이다. 공동체가 불의와 부정으로 무너지면 지도자는 무엇이 무너졌는지를 점검하고, 그 부분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고쳐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에 기도하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에스겔의 역할은 파수꾼, 중보자였다. 파수꾼은 말씀을 외치는 것, 중보자는 무너진 곳을 바라보고 어디를 수축해야 할 지를 기도하는 역할이었다. 팀으로 사역할 때 에스라는 파수꾼의 역할, 느헤미야는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에스라는 파수꾼으로 말씀을 외치고, 느헤미야는 3개월 이상 금식하고 기도하며 영적으로 무너진 곳을 찾아서 중수하고, 훼파된 성벽도 52일 만에 재건했다.

코로나는 중보기도의 불을 당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교회의 아무리 많은 프로그램이 있어도 중보 기도가 없으면 한낮 비즈니스에 불과하다.

 

여덟 번째로 세 가지 목회의 본질에 목숨 걸라.

교회의 모든 사이즈를 떠나서 손바닥 만한 스마트폰 안에 모든 것을 담게 하셨다. 크든 작은 모든 교회를 겸손케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설교에 목숨 걸어야 한다. 예배에 생명을 다해야 한다.


콘텐츠가 성경적이면 기술이나 화려함은 장식에 불과하다. 이 부분을 놓치면 그릇이 아무리 금 그릇이라도 나는 잡초를 담고 있는 것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종말의 때에 분별하고 대비하라.

최근 저명한 신학자 두 사람과 평신도의 책 3권을 읽게 됐다. 존 파이퍼 목사는 코로나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책이라고 설교했다. 옥스퍼드대학교 존 레녹스 교수는 코로나 전염병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역설했다.


신학자 톰 라이트는 그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 앞에 고통당하는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제를 하자고 주장했다. 다 맞는 말이다. 저는 코로나를 접하면서 코람데오란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예배를 회복하고 다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코로나를 통해 우리를 멈추게 하셨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 빨리 가던 우리의 모든 발걸음들이 멈춰 서 있다.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을 일깨우시려고 아람 연합군대라는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을 드셨다. 여호사밧과 유다의 리더들은 갑자기 닥친 수 십만 대군의 아람 연합군 위엄 앞에 감히 싸워볼 엄두 조차 내보지 못한다. 그 위기 상황에서 여호사밧은 기도했다(대하20:12~13).


코람데오우리가 여호와 앞에 서 있다. 우리가 코로나 한복판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고 악한 일에서 떠나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이 소리를 하늘에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치실 것이다.


3월 초부터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예배 시리즈를 설교했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교인들이 한 분도 오시지 않았다. 아니 못 오시게 했다. 교역자들만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렇게 교인 분들 없이 2개월간 예배를 드렸다.대형이건 소형이건 중형이건 목회자가 설교를 듣는 교인들 없이 설교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던 이사야가 생각났다.


이스라엘 멸망의 한복판에서 울부짖었던 예례미야가 생각났다. 그리고 이미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한 에스겔이 생각났다. 보이지 않는 청중을 향해 말씀을 외쳤던 선지자들, 결코 돌아오지 않는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향해 회개를 외쳤던 선지자들. 그리고 그 모습 속에서 민족의 패역한 모습을 보던 선지자들, 그리고 그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던 선지자들!


하나님은 이 코로나라는 상황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게 하신다. 우리의 사명을 돌아보게 하시고, 우리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신다. 교회가 건물이나 프로그램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코로나 앞에 서니, 모든 사이즈가 다 스마트폰 안에 들어가 있다. 작은 교회나 큰 교회나 이 스마트폰 안에 설교로 말씀으로 찬양으로 나눔으로 담겨지고 있다.


우리의 건물과 역사나 자랑스러워 하는 전통이 보이지 않는다. 겸손하게 하시는 시간이다. 본질, 예수님, 복음, 십자가, 부활, 그리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외치는 설교자, 교회만 살아 남을 것이다. 결국 그 본질을 담는 그릇도 본질을 깊이 깨달을 때 내가 어떤 그릇을 준비해야 하는지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개척 교회 시절이 생각났다. 한 영혼이 소중해서 정말 주일에 설교하다가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하던 설교를 멈추고 뛰어나가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는 시간이 코로나 팬데믹이 주는 시간이라 확신한다.


성경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라고 말한다(고전3:16)

왜 우리와 같은 가죽 부대에 왜 우리와 같은 질그릇에 주님을 담게 하셨을까? 왜 우리와 같은 자들을 부르셔서 주님의 몸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을까? 왜 우리와 같은 자들을 부르셔서 제자로 만드셨을까? 왜 우리와 같은 자들을 부르셔서 세상 복음화를 이루라고 목자로 만드시고, 사도도 파송하실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그렇다. 변하지 않는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을 새 가죽부대, 질그릇은 바로 우리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은혜를 깨닫는 자가 결국 겸손하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다.

교회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영광이 있어야 하나님이 머무신다.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시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자. 변하지 않는 그분을 담아내는 겸손한 가죽부대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