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이 ‘너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 되려면 자신부터 뜨거움이 있어야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교회에 뜨거움이 있길 원하신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고 하셨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뜨거움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거나 전에는 뜨거웠지만 지금은 식어버렸거나 미지근한 것이 정상적인 줄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다.
교회가 어떻게 뜨거울 수 있는가?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해 주시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에 쓴 자기에게 관한 것을 설명해 주실 때에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웠다고 했다.
곧 그들이 서로 말하길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는 대화를 나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감동을 받고 은혜가 될 때에 마음이 뜨거워진다.
부산의 모 침례교회 사모님의 간증이 기억됐다. 그녀는 대학 시절에 성경 공부를 통해서 구원의 확신과 함께 뜨거움을 경험했다고 했다. 그 무렵 어느 날 철학 강의 시간에 교수가 예수님을 인류의 4대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자꾸 말하자 마음의 뜨거움으로 교수와 학생들 앞에 서서 “여러분 성경을 보세요. 성경에는 예수님을 4대 성인으로 써 놓은 데가 한 곳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주와 그리스도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소리 높여 증거했다는 것이다. 이런 열정과 열심으로 불신자 몇 명에게 전도를 했더니 그 중에 예수님을 믿고 지금은 선교사와 목회자 부인으로 쓰임 받는 이들도 있다고 전해줬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뜨겁게 한다.
또한 성령이 불과 함께 임하심으로 뜨거움이 있게 된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인 집에 성령이 불과 함께 임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행2:3)라고 쓰여 있다.
그 일이 있음으로 제자들은 복음 전파와 가르침에 열정과 열심이 있는 전혀 새로운 모습과 활동을 보였다. 핍박을 받고 능욕을 당하여도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며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고 했다(행5:42). 이런 성령의 역사와 제자들의 뜨거운 열정과 열심으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창립됐고, 복음은 예루살렘에서부터 땅 끝까지를 향하여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5장 19절엔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란 구절이 있다. 여기서 ‘소멸하지’의 헬라어 ‘스벤뉘테’는 ‘불을 끄다’는 뜻인데 곧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말씀이다. 성령의 불이 꺼진 개인이나 교회는 사랑도 뜨거움도 식어버린다.
오늘날 영국 교회들에 관한 답답하고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감리교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레가 매일 평균 32km씩 말을 타고 다니면서 하루 2번씩, 50여년 동안 수많은 대중들에게 4만2000번 설교했으며, 침례교회의 찰스 스펄전 목사가 약 1000만 명에게 설교를 듣게 하여 대부흥이 일어났던 나라가 아닌가. 하지만 지금 그곳의 교회엔 소수의 노인들이 모이고, 예배당들은 매매되어 이슬람사원으로 바뀌거나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렇게 된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불이 꺼진 탓이 아닐까. 아시아에서 기독교가 최초로 성공한 나라라고 하는 우리나라 교회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줄어들거나 아예 없음으로 교육기관이 운영되지 못하는 교회들이 부지기수이고, 전도의 문은 더욱 닫혀가는 실정이다.
“주여 말씀으로 뜨겁게 해주소서. 성령의 불로 뜨겁게 해주소서”라고 부르짖고 간구해야 함은 뜨거운 열정과 열심으로 인해서 구령과 교회 부흥이 계속된다는 비전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