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할멈은 기침약을 먹고 대낮에 잠에 떨어져 버렸고 나는 거실 소파에서 복음송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잠 깨우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고요의 방 분위기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런데 잠자던 아내가 놀란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부엌싱크대로 달려가면서 또 외친다.
“어쩌면 좋아 솥이 까맣게 다 타버렸네” 나도 달려가 보니 아들이 선물한 독일제 솥이 검게 타 버렸다.
기침에 좋다는 무슨 열매를 끊이려고 올려놓은 솥이었는데 아내의 곤한 잠 때문에 시간을 놓쳐 솥이 타 버린 것이다. 연기도 났다. 나도 코가 막혀 그 냄새를 잃었다. 나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여기 있다간 아내로부터 불똥을 맞을 테니 도망치자. 주섬주섬 대강 책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고 허겁지겁 아파트 문을 열고 달아났다. 달아나면서도 뭘 내가 잘못한 것이나 있나 생각해 봤다.
그 솥이 타 버린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굳이 범인으로 끌고 들어간다면 함께 있으면서 왜 타도록 모르고 있었느냐 일 것이다. 하여간 나는 아파트를 빠져나와 달아나고 있었다. 구리지구촌교회 목양실로 피난처를 정했다.
후유, 잘 도망쳐왔지. 계속 미련스럽게 집에 있었더라면 아내 할멈으로부터 무슨 책임추궁에 꾸지람을 받았을지 끔찍(?)스럽다. 시니어 노인인 나에게는 아직도 판단력과 순발력이 있는것 같다.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귀가하지 않을 수 없어 집에 왔겠다. 아내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조용 침착하고 부엌엔 꺼멓게 탄 솥이 새 솥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젠 전쟁(?)이 끝나고 전운(戰雲)도 사라졌구나. 그런데 아내 할멈의 일성이 나왔다.
“당신, 도망친거죠.” 말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해 아내 할멈은 웃고만 있었다.
나를 도망치게 한 할멈과 할멈 앞에서 도망 하는 남편. 우리 두 내외의 노년은 이런 모습이 었다. 어떤 교훈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사람은 자기에게 져주는 사람을 예쁘게 보는구려” 사람들은 자기주위에 늘 자기를 이겨 주는 사람보다 더러는 자기에게 져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할배와 손자가 씨름을 했겠다. 할배가 그 씨름에서 져줄 때 손자는 천하장사의 명예를 누리는 것이다.
나는 목회할 때에 이래저래 운전면허시험에 3번 낙방하고 운전면허 따기를 포기했다. 그것도 학과시험에서 간단간단 한두 문제가 틀려서 낙방했다. 교회 장로님이 대불한 학원비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나는 교회 앞에 광고시간에 낙방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교인들의 반응이 맘속으로 “아멘 할렐루야”하는 것 같았다.
우리 목사님도 못하는게 있구나. 낙방광고는 대단히 은혜로운 사건 같았다. 평소 좀 거리를 두고 있던 한 집사가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그 후로 그 집사는 나를 무척 사랑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져주심으로 이기신 삶의 모범이었고 그런 식으로 구원 사역을 하셨다. 내 할멈은 도망치는 영감이 그렇게도 예뻤나 보다.
“그래서 내가 멋진 남편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