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위스는 메노파교회에 가입하자는 스마이스의 제안을 거부했는데, 메노파교 회가 계승론, 기독론, 칭의론, 교회론에서 커다란 오류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계승설은 메노파교회만이 참된 침례를 계승했기 때문에, 다른 교파의 침례는 유효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헬위스는 두 세 명이 모인 곳에 함께 있다고 한 그리스도의 약속에 의하면, 모든 교회는 합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와 다르게 메노파교회만 성례에 독점적 권한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헬위스는 누가 성령과 성경을 독점하여 자신들 외에는 하나님의 성례를 집전할 수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계승설은 전 시대의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복음의 자유에도 반하는 것이라 주장했 다. 기독론에 대해서, 헬위스는 메노파교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했다.
이신칭의와 관련해서는, 메노파교회가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능 대신 인간의 내재된 의로움을 믿었기 때문에 개신교 신앙에 위배되고, 교회론과 관련해서는, 위정자(관료)는 교회회원이 될 수 없다는 사상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헬위스는 스마이스 그룹의 메노파교회 가입을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1611년경에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됐다. 그는 워터랜더 메노파교회와 합치면 정체성을 잃게 되고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스마이스는 네덜란드로 온 것을 영구적인 이민으로 생각했으나, 헬위 스는 일시적인 망명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헬위스 무리는 1612년에 영국으로 돌아가서 런던 근교 스피탈 필드(Spitalfield)에 교회를 세웠는데, 그것은 영국 최초의 일반침례교회였다. 이 교회는 스마이스가 암스테르담에 세운 교회와는 다른 교회였다. 당시 영국은 국교회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때여서 비국교도들을 처형하는 경우도 있었다. 헬위스가 영국에 도착하기 직전 바돌로뮤 리게이트가 1611년 3월 18일에 아리우스주의를 전파한다는 죄목으로, 에드워드 와이트맨은 재침례교도라는 이유로 1612년 4월 11일에 각각 처형됐다.
헬위스는 이러한 사건을 들었으며 자신도 같은 운명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첫째, 남겨진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염려와 그리움이며, 둘째, 고국의 교회를 변화시키는 사명을 저버리고 피난간 것을 비판하는 영국 내 분리파들을 의식했을 것이고, 셋째, 서포크(Suffolk) 지역에 있는 분리파들과 그동안 계속 이어져 온 관계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넷째, 이국땅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불법적으로 망명한 것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헬위스는 영국으로 돌아가자 곧바로 ‘불법의 신비에 관한 짧은 선언문’을 국왕 제임스 1세(1603-25)에게 헌정했다. 이것은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영어로 출판된 최초의 책이었다. 이 책에서 헬위스는 왕은 백성들에게 세속적인 모든 사항은 명령할 수 있으나, 신앙과 영혼에 관한 것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왕 제임스 1세는 “주교가 없으면 왕도 없다.” 즉 국왕과 성공회 수장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 하는 철저한 국교회주의자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교분리를 부르짖는 것은 곧 반역과 무정부주의로 간주됐다. 그는 헬위스가 자신에게 감히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공개적으로 말하고, 국교회를 공격하는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했다.
헬위스는 즉시 뉴게이트 감옥으로 던져졌으며, 그곳에서 1614년에서 1616년 사이 어느 날 사망했다.
김용국 교수 / 한국침신대 신학과(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