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한명국 목사 회상록 - 전부를 드려라

흰옷을 입고 인물이 훌륭한 사람이 웃는 얼굴로 나타나서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무엇인가 집어내어 손바닥에 놓고 나에게 보이는데 동그란 은전으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500원짜리 보다 조금 더 컸다. 그를 쳐다보니 모퉁이가 조금 찌그러진 것이지만 ‘고쳐서 사용하라’는 뜻으로 나의 손바닥에 놓고 사라지는 꿈늘 꾸고 눈을 뜨니 새벽 5시였는데 이상한 꿈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영몽(영적인 꿈)이라서 무슨 뜻인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다.
신약시대 로마제국의 은화로 데나리온과 그리스의 은화가 생각났다(마 22:19). 예수께서 무리에게 가르치신 후에 연보궤를 향해 앉으셨는데 부자는 많이 넣었으나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 것을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막12:43)라고 칭찬하신 것은 생활비 전부였음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두 렙돈은 그리스 도의 동전이고 한 고드란트는 로마의 은전으로 같은 값어치였다. 예수님은 작은 빚으로 호리라도 다 갚을 것을(눅 12:59) 말씀하셨는데 무게는 1.7g으로 앗사리온의 1/8이요 고드란트의 1/2에 해당된다(막12:42).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헌금은 당시 유대나라에 통용되던 청동화폐로 가장 작은 값어치로 오늘의 우리의 동전과 같았을 것이나 예수께서 칭찬한 것은 생활비 전부를 드린 여인의 믿음과 헌신적 봉헌을 칭찬하신 것으로 이해되 면서 꿈에 보이신 은전의 의미를 생각해 봤다.


사람들은 외모를 취하나 우리 주님은 중심을 보신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0)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중 하나에게 생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주님은 “지극히 작은 것, 지극히 작은 자, 소자 중 하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것이며 드림과 섬김의 봉사에 깊은 관심과 사랑을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9:48)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눅 12:26)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 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 19:17)라고 청지기 직분으로 말씀하셨 다.


예수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 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의 말씀에 도전과 은혜를 받았 기에 선배 신학생 김인봉 전도사님이 개척해 5년간 사역하며 20여 평의 교회당을 지었고, 안병걸, 최한원 신학생 전도사님들이 이어 1년씩 사역하시다 떠난 후 폐교의 지경이란 대전지방회의 소식에 신대원에 갓 입학한 저는 1964년 3월 8일 주일 이른 아침에 계룡 버스로 유성에 가서 10리길을 걸어 도만리 언덕 위 도안교회를 찾아 이교성 청년과 3명의 자매와 첫 예배를 인도한 것으로 목회가 무엇인지 모르는 철없는 신학생은 오늘에 이르는 57년의 목회여정의 시작이었다.


뒤돌아보니 큰 것, 많은 것, 좋은 것, 높은 것, 값나가는 것, 인기있는 것, 아름다운 것, 대접받는 것 등이 떠오른다.
자기가 먹으려고 가져온 “한 아이”(요 6:9)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림으로 여자와 아이 외의 5000명의 장정이 배부르게 먹고 12 광주리를 남겼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 위에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일곱 번까지 기도하니 지중해 쪽에서 “손만한 작은 구 름”이 일어난다는 사환의 말을 듣고 일어나 내려갔는데 곧 큰 비가 내렸다. 어려서부터 이일지만(以一知萬, 하나에서 만가지를 안다) 또는 적소성대(積少 成大, 작은 것을 쌓아서 크게 이룬다) 란 말을 귀담아 들었지만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슥 4:10)의 말씀은 제 인생과 목회철학의 하나의 지표가 됐다. 그래서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작은 교회를 맡아 이 말씀에 따라 저도 섬기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1930년대 미국의 경제대공황으로 공장은 문을 닫고 내수 경제는 주저앉았다. 찰스 네쉬 형제도 실직했다. 그리고 주일이 다가오지 네쉬의 아내는 남편이 남은 돈을 어떻게 할지 예감이 들어 아이 넷을 생각해 서라도 교회에 십일조만 바치라고 부탁했다.


목사님의 설교는 “우리 미국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므로 저주를 받았다”고 질책하면서 말라기 3장의 “십일조는 물론 어려울 때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바치면 하나님은 전부를 돌려주신다”고 설교하신 말씀에 뜨겁게 은혜를 받아 “생활비 전부”(막12:24)인 18달러 78센트를 담대하게 바쳤다.


아내는 분노했지만 결국 한 달에 520만달러의 수익을 내며 40여개 회사를 허락하셨으며 1967년 8월 춘천지방 초교파 연합회 전도집회에서 말씀을 전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결신하며 결단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배너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