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人情)은 사람이 지닌 정이다. 그것은 사람만이 가지는 사랑의 감정이다. 인정의 대상은 오직 사람뿐이다. 세상에 견정(犬情)이란 말은 없다. 돈정(豚情)이란 말도 물론 없다. 사람만이 정을 가지고 있고 사람만이 인정을 지니고 있다. 세상에서 이렇게 주고받을 정(情)을 소유한 피조물은 사람 외에 다른 피조물은 없다. 문제는 사람만이 갖도록 부여된 이 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걱정이다. 지금 인정의 향방이 문제다. 우선 향방 자체가 없는 인정도 있다. 자기만이 소유하고 끝나버리는 메마른 인정이다.
이래서 정을 줄줄 모른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런 모양도 여간 딱하다.
어떤 인정은 주기는 주되 그러니까 향방은 있는데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는 인정이다. 그런 인정은 흐르긴 하지만 흐름의 대상은 물(物)이다. 돈에게 인정을 붓고 탐욕물에 인정을 쏟고 하는 등이다. 요사이 가장 쉬운 예는 반려견을 인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 하겠다. 오죽하면 그 대상이 사람(人)이어야 하겠건만 동물(動物)이랴. 그 이유는 인정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다. 정을 줘도 받지를 않는다? 정 받을 사람이 너무 없다. 예수 하늘에서 인정을 주려 왔건만 사람들은 마다하지 않았던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혼인 잔치를 베풀고 혼주가 인정을 주고 싶지만 사람들은 이래저래 거절했지 않았던가(마 22장).
동네 사우나탕에는 주로 시니어(senior)들의 애용처인데, 어느 날 그 탕 안에서 70대 후반과 그 초반의 두 나체 노인들이 말싸움이 시작되더니, 나중엔 폭언으로 번지고 마침내 주먹질이 오고 갈 듯 하기에 내가 중간에서 싸움을 말렸는데 잠시 휴전하더니 또 붙어서 싸움이 계속되는 참상(?)이 벌어졌다. 그때 그 자리에 나체 시니어 이십여 명이 있었으나 어느한 사람도 싸움 말리려 일어나기를 않았다. 나체 노인의 싸움이 구경거리가 된다는 건가? 몰인정(沒人情) 살벌(殺伐)한 풍경이 벌어졌다. 아무도 인정을 주려하지 않았다. 그 인정은 나만이 가진 것인지 나 홀로 나체 싸움꾼 말리는 나체 재판관인가?
지금 인정이 없는 시대요, 매말라진 시대다.
더러 있는 인정도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물건 이라니 말이다. 참인정의 소유자는 예수 그리스 도시다. 그는 사랑이시다. 이 인정 쏟아 부어주기 위해 오셨건만 이 인정 받아들인 자 극소수였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모임 교회는 하나 되고 인정 사랑 나누는 집단이란 것을 그리스도인은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는 인정의 정방향을 가리키는 단체다.
권혁봉 목사 한우리교회 원로